RaySoda

김현준

http://photodrawing.net 소소하고 고요한 풍경 보통의 사진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떠난 날이 있다.
저는 책이나 영화를 보고 울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슬픔이라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몇해 전, 인터넷에서 우연하게 읽은 어느 편지 한장에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편지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을 지키던 어느 학도병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절망감 속에서 그의 편지는 오히려 차분하고 담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써내려간 글자와 단어와 문장의 사이에서 그가 느꼈을 감정은 수십년이라는 시간을 가로질러 저에게로 버겁게 밀려왔습니다. 편지의 말미에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의 문장에서 저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성북동 풍경
제주의 바다는,
누이 동생
낙원은 자유의 패러디이다. 헐거운 양식, 감추어진 양식은 낙원이 패러디라는 운명 자체를 감추려 한다. 감추어지는 운명이란 없다. 양산보는 젊은 스승 조광조로부터 얼마나 멀리 흘러왔는가. 양산보는 그렇게 흘러서 조광조와 매우 가까운 곳에 소쇄원을 차린 셈이다. 저녁 어스름 속의 소쇄원에서 나는 사약 한 사발에 피를 토하고 죽은 조광조의 혼백이 풀 먹인 도포자락 휘날리며 무어라고 쉴새없이 중얼거려대면서 제월당 뒤쪽 숲을 거니는 환영을 보았다.
소쇄원을 꾸민 사람은 조선 중종 때의 처사 양산보(1503~1557)이다. 양씨 문중의 기록을 따르면, 양산보는 17세의 나이로 당시 대사헌인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 출입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의 조광조는 삼십대의 청년으로, 이념화된 주자학의 가파른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조광조의 낙원은 말과 사유의 낙원이다. 조광조는 명증한 언어로 표현되는 사유의 힘에 의해 현실을 재편했다. 그는 반정의 공로에 빌붙는 원로대신들을 '소인배'라는 극언으로 매도하면서 기극권을 박탈하였고 소격서를 철폐함으로써 이성의 위엄을 과시했다. 말과 사유와 권력과 현실이, 조광조에게는 동일한 것이었고, 조광조의 낙원은 그 네 개의 범주들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 떨어져야만 비로서 가동되는 근본주의자의 낙원이었다. (.....)
그렇게 떠나고 싶었는데...
달동네 비탈에 꽤나 큰 나무가 있다.
티격태격, 부녀 사이^^
사람은 혼자 살 수도 없지만, 또 더불어 살 수도 없다.
숲은 아득하고 아늑하다.
어머니와 누이
날 잊지마세요
노서노동고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