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을 꾸민 사람은 조선 중종 때의 처사 양산보(1503~1557)이다. 양씨 문중의 기록을 따르면, 양산보는 17세의 나이로 당시 대사헌인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 출입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의 조광조는 삼십대의 청년으로, 이념화된 주자학의 가파른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조광조의 낙원은 말과 사유의 낙원이다. 조광조는 명증한 언어로 표현되는 사유의 힘에 의해 현실을 재편했다. 그는 반정의 공로에 빌붙는 원로대신들을 '소인배'라는 극언으로 매도하면서 기극권을 박탈하였고 소격서를 철폐함으로써 이성의 위엄을 과시했다. 말과 사유와 권력과 현실이, 조광조에게는 동일한 것이었고, 조광조의 낙원은 그 네 개의 범주들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 떨어져야만 비로서 가동되는 근본주의자의 낙원이었다. (.....)
젊은 스승의 낙원이 붕괴되자 양산보는 지체없이 낙향하였다. 양산보는 한 작은 강산의 서늘하고 깨끗한 물가에 자신의 낙원을 차렸다. 그는 다시는 대처의 땅을 밟지 않았고 세상잡사를 글에 담지 않았다. 그는 다만 돌과 나무와 물줄기를 끌어모아 소쇄원을 꾸몄다. 소쇄원에서는, 세계를 혹은 풍경을 관찰하고 거기에 관하여 말을 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의 입지와 위상이 물리적 공간의 거죽으로 돌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쇄원에서는 어떤 풍경이나 정자나 나무도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나 시선의 각도로부터 자유롭다.
'풍경과 상처' (김훈) - '낙원의 치욕' 중에서 발췌
2014. 1 담양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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