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마이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언젠가? 아마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지금이였다고 말하겠지...
이기형 선생님 1917년 생으로 89세. 함경남도 함주 출생하셔서 12세 야학통해 반일 독립운동에 눈을 뜨셨음. 징용 피해 안양에 있는 조선비행기 회사에서 해방을 맞은 뒤 1945. 9~46 년 말까지 기자생활 동신일보 일하다 중래신보로 옮겨감. 미군정 출입기자, 우남 귀국 당시 동신일보 기자, 46년 메이데이 때 미군정에 대한 항의 시위하심. 47년 몽양선생의 암살 후 월북하여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를 하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심. 이기형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숨겨진 좌익 어르신이시다. 20대에 절필하여 통일 된 조국에서 시를 쓰겠노라고 하셨지만, 몇 미터만 걸어도 다리가 저리는 현실에 60이 넘은 나이에 펜을 드셨다. 여운형이 아끼는 청년에서 세상이 더러워 뒷골목에서 시를 쓰는 노인이 된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신 분. 두손으로 플러스펜을 꾹꾹 눌러가며 시를 쓰시는 모습에 알 수 없는 한숨이 나오는 건 왜 일까?
김계유 선생님 김계유 (80) 일제시대 여수군청에서 근무 43년 일본에서 와서 여수군청에서 근무 군청에 들어가기 하늘에 별따기. 군수에게 가서 넣어달라 부탁. 황국신민이기 때문에 징용가는 사람뽑아내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심. 당시 일본말 잘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으셨다고 함. 해방 이후 여수 군청에서 근무하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셨음. 김계유 선생님을 보면서 현재 우리가 말하는 친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어느 바운더리까지가 친일인지... 정말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봐서는 안되는 건지... 황국신민으로서 소시민의 삶까지 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황금주 할머니 39년 학교 졸업을 몇일 앞두고 만주로 끌려가 낮에는 병원에서 사환으로 일하시다가 밤에는 일본군의 위안부로 몹쓸 일을 당하신 황금주 할머니. 인터뷰 내내 "이런 이야기를 해야되나, 말아야되나"하시면서 때로는 흥분하시고 때로는 눈물을 보이시며 옛날 생각이 나서 우유와 막걸리는 안드신더던 이야기에 내가 알던 위안부들의 이야기는 정말 1/10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고 자식을 못낳게 만든것이 일본에 가장 원망스럽다는 말에 지금은 할머니지만 한때는 평범한 여자이며 소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후내 수요시위에서 일본 대사관에서 욕을 퍼붓는 것만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욕을 들어주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정순택 1921.5.8일 충북 진천군 출생. 1944.1 경성경제전문학교 졸업. 졸업 직후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당함. 1945.11 경성경제전문학교 재입학. 1946.6 동상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2년 편입. 1946.7 신한공사 입사. 1947.6 상공부 관산물자 배급소 경리과장. 1949.5 월북. 1958.7 대남정치공작원으로 남파되어 체포됨. 1959.8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무기징역 선고. 1980.2 반공법 위반으로 제2형 10년 선고. 1989.12 가석방 출소. 이후 현재까지 보안관찰 대상자. 2005.3 현재 반미 기차 시위하시며 만남의 집에서 월 15만원의 생활보호 대상금으로 살고 계심. ----------- 토요일 만남의 집으로 가서 정순택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들리지 않는 귀, 종이에 적어가며 물어물어 책상 깊숙한 곳에 놓아두신 사과 두개와 낡은 커피포트로 끓인 물을 먹으며. 아버지가 반대했던 대학입학부터 공산주의자였던 친척이야기에 담배가게하며 생활 해나가던 가족을 생각하며 들어갔다던 신한공사 시절까지 48년 이후 드라마틱한 선생님의 삶의 시발점이었을 해방공간 속 당신의 생을 들었다. 3평이 안되는 좁은 방에 가득한 북한 책들을 보며 그의 변하지 않는 신념을 엿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몸에 베어진 감옥에서의 습관들을 보며 사람의 아까움을 느꼈다... 나오는 길, 갑자기 "기회주의"란 말이 생각났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김관오/84 대한노총 전신 대한독립촉성노동연맹창설멤버 황해도 사리원 출생 / 광복 당시 청년들이 모여 일본신사 불지르셨음. 46년1월에 월남. 공산당과 싸우다가 지탱할 수 없어 월남하신 이후, 이후 서북청년회가 되었던 평안청년회에 가입하시다가 대한 청년단으로 통합될때까지 활동했었다. 대한노총은 창설시 파견되어 가셨음. 대한노총 창설 이후 해방 공간 속에서 전평과 치열하게 싸우셨음. 당시 전평과 싸우고 공장에서 내모는 것이 가장 힘드셨다고 함. "당시 대한 노총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는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이다. 공산당은 우리의 미풍양속 파괴하고 신탁통치 문제 때문에 민심이 많이 떠났다." ----- 요즘 우익쪽 선생님들을 만나보면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생애를 지금의 모습으로 생각해보는 것과 당시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 과연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위정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역사는 휘몰아쳐지는 큰역사 속에서 그냥 반응되어질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조차도 그렇지만^^
순천 경우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논리라는 틀을 끌어온다. 그렇게 이루어진 자기 합리화는 평생을 통해 삶에 고스란히 묻어나게 된다. 우익단체이자 전직 경찰관들을 모임인 경우회 회원분들. 우리 나라 현대사에서 45년부터 48년까지의 시간 속에서 과연 그들은 어떻게 그 틀을 끌어온 것 일까? 좌와 우가 공존하던 시대에 지금처럼 확고하게 나는 "우"라고 주장할만큼 사상이 강했던 것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끌어다 준 것을 무의식속에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일방적인 수용이었는지. 어쩌면 우익단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젊은 세대인 나나.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혀를 차는 나이드신 세대나. 스스로를 합리화 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 체.
Pro jap과 Pro job의 경계 홍순복 선생님 인천 경우회 회장 역임 1941년 양정고등학교 졸업후 면서기로 일하시다가 조정팔이라는 순사에게 억울하게 뺨을 맞은 뒤 순사 시험에 응시 수석합격함. 1941년 종로 경찰서에서 외근수사 일을 처음으로 1945년 9월 부터 이천서 경무주임, 안성 사찰 주임, 1945년 해방 당일 해방 사실을 모르고 출근, 이후 건준을 도와 치안활동. 1950년대 경찰 퇴임 후 반공운동. ----- "해방 직후 맞아 죽은 사람은 Pro jap이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Pro job이다..." 친일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일제 시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이야 당연히 바른 선택을 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그 때의 바른 선택은 지금과는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난, 아마도 pro job을 택했을 것이다... 개인주의가 강한 나는 민족보다는 나 자신의 먹거리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뒷날 '누가 나를 비난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도 해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체...
집으로 가는 길... 낡고 허름한 집에 살아도... 행복만 하다면, 살아볼만한게 인생이라는 내 생각... 아직 어린 걸까?
길가다 맞은 죽음... 영도 선착장앞에서 만난 늙은 개의 죽음... 죽기전에 어디로 가고 싶었는지 목이 줄끝에 얽여있다... ......
4인의 역사학자... 왼쪽부터 차하순, 강만길, 이만열, 한영우 교수님... 우리 시대의 스승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네분... 이렇게 네분이 모인 게 평생 처음이시라고 하시니 의미가 깊은 사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때문에 아까운 사진올리기지만, 올렸습니다...^^
여의도 밤거리... 신기한 동네 여의도...
월곡동 조합장 추천... 왜 이사람은 조합장이 되려는 걸까?
run... 월곡동 아이...
추자도 여관... 추자도의 오래된 바다 냄새나는 여관에서...
사진사... 용호동 선착장에서...
bus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스와 택시사이에서 삶의 이상을 깨닫게 해주는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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