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린[玄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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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학(文在學) 묘역번호: 2-34 생 애: 1964.06.01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광주상업고등학교 2학년) 유 족: 문건양(부) 며칠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어머니는 25일 도청으로 갔다. “너, 계엄군이 또 들어온단다. 긍게 인자 집에 가자.” “엄마 아무래도 창근이가 죽은 것 같아요. 긍게 창근이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조금만 더 심부름하다가 갈게.” “그러다 너 죽으믄 어찔라고 그러냐?” “안 죽어. 군인들이 들어오면 손들고 항복하면 되지. 긍게 걱정 말고 빨리 집에 가요.” 26일 다시 도청에 갔으나 재학이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 전화가 왔다. “엄마, 인자부터는 밖에 못 나가요. 나, 그냥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온다는 때에는 제주도고 강원도고 할 것 없이 끌려 다니다 돌아왔다. 봉고차에 실려 다니는 그녀를 보고 속 모르는 사람들은 관광객이라고 착각을 했을 터였다. 여관에 감금되어 있다가 그곳 사람들한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관을 몰래 빠져 나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광주에서 왔는디라. 80년도 5월에 전두환이가 내 자식을 죽여 부렀어라. 군인들이 총으로 쏴서 죽어부렀는디, 광주에 전두환이 내려온다고 우리가 행패 부린다고 나를 여기까징 데리고 왔단 말이요. 그놈들이 어디 사람이라요?” “당신 자식은 폭도야. 폭도 부모가 무슨 할 말이 있어? 총은 군인이나 경찰이나 들 수 있는 건데 왜 당신 아들이 들고 있느냐 말야. 그러니 잔말 말아.” 왜 어린 고등학생이 총을 들고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는 필요가 없었다. 그저 총을 들었으니 폭도일 뿐인 것이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지난 세월의 모멸감은 죽어도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어도 달라질 게 없었다... 재학이를 신묘역으로 이장하는 날, 아들의 뼈를 고르는 어머니의 손이 한없이 떨리고 가슴에 설움이 북받쳤다. 재학이 얼굴의 뼈는 코 아래쪽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재학이를 단 한번만이라도 보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어머니를 보고 환히 웃어주던 살아생전의 재학이 얼굴을 다시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져서 재학이를 부르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유골을 가슴에 품고 목놓아 울었다. 다시 돌아와 주지 않을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문용동(文龍童) 묘역번호: 2-33 생 애: 1953.09.16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기 타: 학생(호남신학대학교 4학년) 유 족: 문근재(형)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이 엄청난 시민들의 분노는 어떻게 배상해 줄 것인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서른두 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전대 부속병원 영안실의 시체, 시체들 병원마다 꽉 메인 총상환자들 칼빈 소총과 M1으로 무장하고 눈이 뒤집어진 시민들의 차량의 돌진 완전히 폐허 같은 금남로 전소돼버린 문화방송국 앙상한 골재만 남고 타버린 수많은 차량들 이 엄청난 피해의 현장 누가 이 시민에게 돌을, 각목을, 총기를 들게 했는가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이럴 수도 있는가 우린 참여하여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계엄당국의 엉터리 같은 오도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니 그럼 내가, 나도 불순분자란 말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우린 후세에 전 국민에게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전 시민이 빵과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르는 광경이 적색, 폭도란 말인가 뭔가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여줘야 한다 나의 불참이, 나의 방관이, 외면이 수습을 더 늦게 지연시키는 것이다 의롭게 살고자 5.18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문용동이 남긴 1980년 5월 22일의 일기 속의 글이다. 그는 당시 호남신학대학에 다니던 신학생이었다. 자신의 신앙에 누구보다 충실했으며 누구보다 아름답게 살고 있던 청년이었다... 총기를 회수하여 계엄군에 반납하는 것은 그동안 시민들이 흘린 피를 헛되게 하는 항쟁의 포기라고 여기는 이들과 총기를 반납하고 계엄군과 협상을 하려는 세력과의 분쟁이 있는 가운데 하나둘씩 모아지는 총기의 관리가 필요했다. 문용동은 도청 지하실에 배치되어 무기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글 속에서 말하듯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헬기의 선무방송을 듣고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나섰던 그들은 자동소총에 맞았다. 앞장섰던 문용동이 가슴에 3발의 총을 맞고 먼저 쓰러졌고, 김영복은 파편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김종철(金鐘哲) 묘역번호: 2-32 생 애: 1962.03.06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미상 사망 장소: 미상 기 타: 자개공 유 족: 이혜남(모) 1980년 5월 19일 월산동 파출소가 불탔다. 양동에서 살던 김종철은 아버지 김영배 씨와 함께 월산동에 살고 있는 외삼촌네가 걱정되어 20일 외삼촌댁에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보았다. 부상당한 학생들이 실려나가는 것을, 태극기에 덮인 리어카에 실린 시체를 보고 말았다. 열여덟, 어리지만 젊은 나이의 김종철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로 시위대열에 참여하였다... 27일 0시가 되자 도청의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모든 전등도 꺼져 버렸다. 어둠 속에서 도청 상황실은 술렁였고 가두방송에 나섰다.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 무기를 들고 싸웁시다. 사랑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들을 살려주십시오.” 통곡과 서러움의 밤이 사그라들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전사들도 쓰러졌다. 종철도 그날, 27일 계엄군의 총에 열여덟 살의 짧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삶을 마감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김종연(金鐘然) 묘역번호: 2-31 생 애: 1961.11.11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장흥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재수생 유 족: 김세배(부) 그해 5월의 막바지, 그날도 장흥군청 내 작은 우체국 집배원 김세배 씨는 흐르는 구슬땀을 닦으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편지를 전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체국 직원이 그가 일하는 구역에 나타났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우체국으로 들어오라고만 했다. 일해오던 동안 한 번도 있은 적이 없는 귀국(歸局) 명령에 어리둥절했고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우체국에 들어선 그를 발견한 사람들의 수근대는 소리가 웅얼웅얼 귀를 울렸다. 그 속에서 그가 들은 소리는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에 가려고 재수를 하고 있는 종연이가 죽었다고 했다. 아직 배달하지 못한 우편물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내팽개치고, 모자와 옷은 갈아입지도 못하고 그대로 광주로 향했다... 시위에 적극 가담하던 종연이는 27일 마지막날까지 도청에서 나오지 않았다. 새벽이 오기 전에 계엄군이 다시 도청을 향해 총을 들이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열흘간 피 흘리며 쓰러진 시민들의 억울한 영혼을 외롭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김부열(金富烈) 묘역번호: 2-29 생 애: 1963.05.03 ~ 1980.05.24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지원동 부엉산 추정 기 타: 학생(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3학년) 유 족: 김차남(모) 돌아오지 않는 부열이의 손에는 이미 총이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기다릴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광주의 시민들을 죽였는지 봐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린 가슴에 채워진 분노는 총을 들고 적들과 싸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를 한 계엄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양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제7특전여단의 33, 35대대와 제11특전여단의 61, 62대대는 지원동 주남 마을에 기지를 설치하고 광주-화순 간 도로를 차단한 후 봉쇄 작전을 펼쳤다. 이에 화순에서 광주로 들어오던 많은 시민과 광주로부터 화순으로 나가려던 많은 양민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했고, 지원동 주남마을 주민들에게도 총격이 가해졌다. 부열이는 주남마을 야산에 매복한 군인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되려 그들의 총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집을 나간 이후의 부열의 행적을 알 수 없었고, 23일과 24일 사이에 계엄군의 총에 사살당했다는 것만이 이후 봉쇄 작전의 임무를 인계받은 20사단 군인에 의해 밝혀졌다... 열흘, 스무날이 지나고 6월 12일 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부열이가 주남마을 뒷산에 매장되어 있으니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땅을 팔 인부들을 사서 부열이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함께 간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부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처럼 처참하게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부열이의 목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가슴팍도,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신체의 조각을 잃어버리고 검붉게 썩어가고 있는 그 시신이, 자다가 눈을 떠서도 볼 수 있었던 형제의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사실에 치떨리는 분노가 솟을 뿐이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김명숙(金明淑) 묘역번호: 2-28 생 애: 1965.09.04 ~ 1980.05.27 성 별: 여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대학교 앞 천변 기 타: 학생(서광여중 3학년) 유 족: 김요중(부) 5월 27일 도청이 계엄군에 함락되고, 다시 광주에는 군인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전남대학교 정문 용봉천 주변에도 공수부대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명숙이는 저녁에 집에 들어온 엄마에게 밥을 차려주며 책이 없어서 뒷집에 사는 인숙이네로 책을 빌리러 가야겠다고 했다. 아직도 어수선한 바깥 상황에 맘이 놓이지 않아 엄마는 가지 말라고 말렸다. 밥을 먹고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명숙이는 기어코 친구네로 가고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지나는 명숙이를 보고 대학생이 어디선가 쫓겨 가는 것으로 생각한 군인들이 공포탄을 쏜 것이다. 기겁을 한 명숙이는 개천 밑으로 뛰어 내렸다. 한참 후, 개천 위로 기어 올라오던 명숙이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던 군인들은 기어이 한 방의 총을 쏘고 말았다. 살을 찢는 비명이 5월 저녁 하늘에 울려 퍼졌다... 군화발로 방에 들어선 군인들은 엉덩이에 맞았으니 괜찮을 것이라며 차를 불렀다. 군 지프차에 명숙이를 싣고 광주 국군통합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괜찮을 거라던 명숙이는 가는 도중 가늘게 내쉬던 숨마저 멈추어 버렸다... 밖으로 나돌아서 부모 욕 먹이고 속 썩이고 하는 자식이었다면 혹시 조금 덜 아플 수 있을까? 무엇 하나 미운 곳이 없던 딸이라서 더욱 아깝고 애틋하다. 자식에게 베풀기만 하는 것이 부모라는데 명숙이에게 어머니는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린것에게, 공부하기도 바쁜 아이에게 고된 살림까지 하게 하고, 친구들하고 맘껏 놀게 해주지도 못해서, 공부도 곧잘 하던 아이에게 참고서 하나 맘 놓고 사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평균적이지 않은 몇몇의 보상금에 대한 보도에, “그만큼 받았으면 되지, 뭘 더 바라냐? 이제는 입 다물어도 된다.”라는 식의 철없는 말들을 들을 때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쏟아 참을 수가 없다. 어떤 부모가 제 자식 죽고서 돈 몇 푼 받았다고 좋아할 것인가? 그것도 그렇게 서럽게 투쟁했더니, 겨우겨우 인심 쓰듯 던져주는 정당하지 않은 대우를 어떤 부모가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어쩌면 자기가 겪은 아픔이 아니라고 그렇게들 쉽게 말하는지 야속하기만 하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김동수(金東秀) 묘역번호: 2-27 생 애: 1958.07.02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장성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조선대학교 3학년) 유 족: 김영석(부) ‘폭도’ 김동수는 1980년 당시 조선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불심에 심취해 있던 그는 대학생 불교연합 전남지부장으로 활동을 했다. 5월초에는 고조할아버지의 묘지 이장 관계로 고향인 장성에 머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 서너 명의 친구들이 동수를 찾아왔다. 초파일이 곧 다가오고 있었고 지부장인 동수가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점심이라도 들고 가라는 아버지의 청을 만류하고 산 일을 하던 동수와 일행은 바로 광주로 올라갔다. 동수는 5월 17일에 도청 앞 점등식에서 사회를 맡아 행사를 진행하고 다음날 18일 오전에 연합회 일로 목포에 내려갔다. 광주에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고 시내 곳곳에서 청년, 학생들이 그들의 몽둥이와 칼에 난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수는 전혀 알지 못했다. 5월 21일 드디어 계엄군은 광주의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너무도 기가 차고 분한 시민들은 광주 전남 일원의 무기고를 향해 차를 몰아갔다. 목포에 내려온 시민군이 들려주는 소식을 동수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광주에 올라가야 했다. 목포의 동료들에게도 여러 날 신세를 지고 있어 그것도 미안했다. 부처님의 진정한 자비는 정의를 위해 대중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 젊은 청년은 시민군의 차에 올라탔다... 그날은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다. 장성군청에 다니는 집안 아저씨뻘 되는 김용대 씨가 찾아왔다. 논에 있는 동수의 아버지를 다짜고짜 끌어내 뒤따라오게 하고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 사람아, 내가 이 말을 어떻게 자네한테 해야 하는가.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 글고 버티소. 그 길밖에는 없네. 동수가 죽었다네. 도청에서 총에 맞은 것을 망월동에다 묻어 놨다네. 시방, 시청에서 차가 와 있응게 그놈을 타고 광주로 올라가세.” 1980년대 후반에 유족회에 합류하셨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 앞에 붙은 폭도라는 오명을 씻어주고자 애를 쓰셨다. 명동성당에서 몇 개월간이나 고생하며 농성을 하고 시위에 쫓아다녔던 지난날 덕분에 이제는 동수는 더 이상 폭도가 아니다. 민주화를 꿈꾸다 장렬히 산화해간 열사이다. 처음부터 폭도인 적도 없었던, 처음부터 열사였던 아들의 이름을 찾아 주었다. 하지만 5․18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은 짐승보다도 못하게 여기던 죄인들은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아가고, 법이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선한 사람들은 날마다 고통 속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는 그들은 그대로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사들인 총칼을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되돌렸던 가해자들은 일말의 죄의식조차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떳떳하다. 그리고 아픈 가슴을 안고 세월을 버텨온 이들은 여전히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해 아프다. 조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얼굴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퇴색되어 가는 것이 더욱 아프다. 온갖 것을 다 가져다 주어도 내놓을 수 없었던 자식을 보내고 술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아버지는 그래서 더욱 분하고 억울하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조일기(曺日奇) 묘역번호: 2-26 생 애: 1948.05.20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화순 사망 원인: 타박사 사망 장소: 광주공원 기 타: 식당 주방장 유 족: 김복의(모) 서울에 있는 줄만 알았던 조일기는 5월 17일 중흥동에 사는 셋째 형 일우 씨의 집에 들렀다. 그리고 항쟁기간 중에 다시 한 번 들렀다. 그때 조일기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다. 형은 깜짝 놀라며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렸다. 총을 뺏어 탄창을 빼고, 총 따로, 실탄 따로 감추어 두었다. 그 정도의 만류면 동생이 들어줄 것이라고 여긴 형은 집에 들른 동생에게 주려고 딸기를 사러 나갔다. 그 사이 조일기는 총을 찾아 빈총만 들고 다시 나가버렸다... 그해 5월 10일간의 항쟁기간 내내 광주 시민들은 모두 조일기와 같은 마음이었다. 골목을 누비며 거리를 누비며 한 목소리로 계엄 철폐를 외치고, 사그라지는 민주주의의 불꽃을 다시 피우고 싶었다. 조일기는 그 최전방에 서서 총을 들었다. 정의가 아닌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막아야 했기 때문에, 다시 군부의 손아귀에 내 부모 형제를 맡길 수 없었기에 총을 들었다.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벗어나지 않은 조일기에게는 광주공원으로 들어올 공수의 경로를 차단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광주공원 폭도 소탕 작전의 임무를 부여받은 제7특전 여단은 실내체육관, 시민회관, 도서관 및 양로회관, 박물관 및 미술관 등 네 개 건물을 선정, 광주공원의 시민군을 완전히 와해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통합병원을 거쳐 광주공원까지의 특공조 진입로는 시민군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고,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총성으로 지역주민들은 밤새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27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제7특전사의 작전은 동이 터 오는 5시 42분 공원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끝이 났다. 밤새 이길 수 없는 적들과 맞서 총을 쏘았을 조일기는 아침에 광주공원 정문 왼쪽에서 경찰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총상이 아니었다. 전신을 구타당하고 머리가 깨져 죽어있었다. 목표물을 향하던 적들의 총을 피해 살아남았지만 교전이 끝난 후에 공수에 붙들려 매질을 당하다 사망한 것이다. ‘광주시민은 폭도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도망가면 끝까지 추적하여 반드시 때려잡는다. 죽여도 좋다.’는 항쟁 초기의 진압방식은 마지막까지 적용되어 조일기는 목숨까지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윤상원/윤개원(尹開源) 묘역번호: 2-11 생 애: 1951.08.19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자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야학교사 유 족: 윤석동(부) -------------------------------------------------------------------------------------------------------------------------------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 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 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서울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애국시민들의 궐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가 하나로 단결하여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를 영원히 추방할 때까지 싸웁시다. 최후의 일각까지 단결하여 싸웁시다. 그러기 위해 5월 20일 정오부터 계속해서 광주 금남로로 총집결합시다! --------------------------------------------------------------------------------------------------------------------------------- 윤상원은 5월 19일 아침 무렵, 김상윤이 운영하는 사회과학서점인 계림동의 녹두서점에서 김상집과 함께 국민연합의 서울지역 관계자들과 만남을 갖고 서울 등 여타 지역에 광주의 상황을 연락했다. 오전부터 시위현장에 참여하고 공수부대 만행의 현장을 확인한 그는 시위투쟁의 조직적 홍보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오전 중에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은밀하게 전단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위의 선언문으로 이는 5월 26일까지 모두 9호가 제작 배포되었던 투사회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난한 이웃들 속에 함께 한 그에게도 어김없이 5월의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1979년 10월 유신의 우두머리 박정희가 암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민주화의 봄이 열렸다고 믿었다. 윤상원은 녹두서점에 출퇴근하면서 재야인사, 청년운동가와 빈번한 접촉을 하고, 서울의 이태복과의 만남을 지속하며 전국 단위 비공개 반합법 노농운동단체의 결성을 모색했다. 윤상원은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학생노동자연맹 두 조직에 가담하여 이태복과 돈독한 우정을 쌓아갔다. 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 햇불시위까지, 그는 전두환을 몰아내고 계엄령을 해제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농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석하고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지만, 결국 5월 17일 새벽을 기점으로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윤상원은 적극적으로 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대대적인 저항을 펼치면서 최후까지 싸워, 민주화가 이 땅에 뿌리박고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동지들과의 다짐도 그 시기에 있었다... 5월 26일 저녁, 공수부대가 다음날 아침 일찍 도심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때 도청에서는 300여 명의 시위대가 있었는데 윤상원은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여자들과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했다... 새벽 3시가 넘어 계엄군 공수부대 특공대가 도청 주변을 포진하고 1차 집중발포를 했다. 윤상원은 이양현, 김영철 등 다수의 시민군과 민원봉사실 2충에 있는 도청 회의실에 들어가 노동청 방면의 창틀에서 수비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살아오는 어머니의 얼굴,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면 다시 살아오는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 유난히 자신을 아껴주시던 할머니의 까칠한 손이 그대로 느껴졌다. 민중 속에서 살아가겠노라고 다부지게 들불야학을 시작하고서 젊은 날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한 후배 박기순의 모습까지, 윤상원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자신의 곁에서 총을 들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어린 동생들의 생명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들이 떠나고 나면, 정말로 이 땅의 민중들은 큰 숨 한 번 내쉬고 살 만한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비록 당장 내일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자신과 동지들이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양현, 김영철, 윤상원은 서로 손을 맞잡고 자신들의 최후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금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가 영원히 승리하기 위해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해야 한다...” 새벽 4시가 넘어 어슴푸레 날이 밝아올 무렵, 도청 뒷담을 넘어 공수특공대원들의 집중사격이 이어지고 윤상원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피를 흘리고 있는 그는 아직 가는 숨이 붙어있었다. 이양현과 김영철이 쓰러진 윤상원을 부둥켜안고 커튼에 싸서 옮기려는 순간 수류탄이 터졌고, 커튼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이렇게 윤상원은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가슴 뜨겁고 아픔 가득했던 열흘간의 광주항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을 꺽고,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꿈을 꾸기를 바랐던 많은 노동자의 꿈을 짓밟은 채 항쟁의 막은 내려졌다. 5월 27일 새벽에 도청의 비명 속에 살아남은 이들은 또 공수부대에게 끌려 나갔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전재수(全在洙) 묘역번호: 2-22 생 애: 1969.05.15 ~ 1980.05.24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진월동 앞마을 동산 기 타: 학생(효덕초등학교 4학년) 유 족: 전영병(부) 재수는 초등학생이었다. 효덕초등학교 4학년, 새 학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들꽃 만발하고 세상이 온통 푸르러만 가는 5월에, 그 아이는 엄마의 곁을 떠났다. 그날 재수는 동네의 전경 좋은 동산 풀밭에서 오르락내리락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서 밑으로 내려오려고 준비하는 아이들, 그리고 열심히 꼭대기를 오르기 시작하던 재수는 콩 볶는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그 작은 아이들은 콩콩 뛰는 가슴에 엄마를 부르며 뿔뿔이 숨을 곳을 찾아 들었다. 재수도 동산 위를 향해 덜덜 떨며 오르고 있었다. 재수의 발에서 고무신이 벗겨져 나갔다. 아흐레 전 엄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애지중지 아끼던 고무신을 버려두고 올 수 없었던 재수는 고무신을 주우러 돌아섰다. 빗발치던 총알은 재수의 다리며 등에 가서 박혔다. 자그마한 아이의 허리에서 대퇴부 사이를 무려 여섯 발 이상의 총알이 지났다. 배와 다리 사이가 만신창이가 되어 재수는 즉사했다... 단란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다. 아들이 죽고, 엄마가 뒤를 따랐으니, 재수의 아버지도 다른 형제들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서로 방황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입에서 떼지 못했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씀보다는 각자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했다. 깨어진 가정의 행복 앞에 아버지는 자신을 책망한다... “재수가, 얼마나 수말스러운지, 어른들 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 뭔 말만 하믄 금방 따르는 아이였당게. 근디 내가 마당에서 지 동생이랑 놀고 있는 그놈한티 시끄럽다고, 조용히 좀 놀으라고 한 마디 한 것이여. 긍게 재수가 놀던 것을 뚝 그치고 있다가 심심했든지 나가서 놀고 온다고 나가등만. 지 동생은 내가 뭐라고 하든지 지 맘대로 떠들고 노는디 말이여. 그렇게 나갔는디 그 놈이 총을 맞아부렀어. 내가 조용히 하라는 말만 안 했어도 재수가 안 나갔을 것인디. 내 탓이여.”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임병철(任炳哲) 묘역번호: 2-21 생 애: 1956.12.26 ~ 1980.05.24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송암동 자택앞 노상 기 타: 운전기사(남선연탄) 유 족: 조순례(모) 임병철은 전남 곡성에서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광주의 연탄공장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와 함께 송암동 주택가에서 살고 있었다. 한 집에서 세 명이 학살당한 바로 그 집이었다... “청문회 때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증언했잖아요. 그 집에서 세 명이 죽었어요. 그 속에 병철이가 끼어 있었어요. 동생은 그 당시에 남선연탄 다녔어요. 직장에서 가까우니까 그 집에 살았는데, 그 집에서 일곱 가족인가 살고 있었어요. 그 당시 그곳이 지금 인성고 근방이죠. 그때 인성고 앞에서 총격전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군인들이 많이 죽었죠. 그래서 동생은 무서워서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죠. 그 집은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집이었는데, 얼마나 총구멍이 많이 났는지 몰라요. 벌집 됐어요. 그 집을 일차로 사격한 다음에 진압군들이 들어가서 젊은 사람 세 사람을 끌어냈어요. 할머니가 앞을 가로 막고 데모꾼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 할머니 아들이 울산에 취직해가지고 모처럼 휴가를 나왔나 봐요. 휴가 나와서 집에 있는데 그런 상황이 일어났지요. 하지만 군인들은 세 사람을 밖으로 끌어냈어요. 도로변으로. 집에서 도로변까지 60~70미터 정도 될 거에요. 그 도로 바로 옆에서 세 사람을 쏴서 죽여 버렸어요.” 형이 기억하는 임병철은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순박한 청년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해서 친구들도 많았다. 지금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제일 잘 생기고 제일 좋은 놈이 죽었다고, 제일 좋은 놈을 일찍 데려갔다고 말한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김승후(金勝厚) 묘역번호: 2-16 생 애: 1961.08.20 ~ 1980.05.24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송암동 자택앞 노상 기 타: 공원 유 족: 김기수(부) 공수부대와 교도대 간의 교전이 계속되는 동안 도로 옆에 있던 송암동 주택가는 양편의 총탄이 함께 쏟아졌다. 교도대의 병력을 잠재운 공수부대는 이미 군끼리의 충돌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폭도들로 인해서 자기 동료들이 죽었다며 송암동 일대의 주택가를 다시 수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총탄을 피해 숨어있던 주민들에게 모두 손을 들고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 어린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모두 두 손을 치켜들고 마당으로 끌려 나와야 했다. 그리고 공수들은 젊은이들을 색출했다... 모두 3세대가 살고 있었던 승후네 집에서 군인들에게 끌려나온 이는 모두 세 명이었다. 포항에서 공장생활을 하다가 집에 다니러 와 있던 권근립, 바로 옆에 있는 연탄공장의 운전기사였던 임병철, 그리고 선반공 승후였다. 세 사람의 신분을 차근차근 설명하지만, 공수부대원들은 “잠깐 물어볼 것이 있으니 조사가 끝나고 이상이 없으면 금방 돌려보내겠다”고 세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서 조사를 받는 것이냐”며 가족들이 따라 나서자 문밖에 있던 공수부대원이 총을 들이대며 집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애가 탔지만 가족들은 밖을 내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청년들을 끌고 나간 공수부대원들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철로에 그들을 세웠다. 그리고는 무조건 대검으로 찔렀다. 승후는 엉겁결에 대검을 손으로 잡아버렸다. 총에 착검된 대검이었다. 공수부대원이 찔렀던 총을 다시 끌어당겨 버리자 대검을 잡고 있었던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옆에 서 있던 공수부대원의 M16 총구가 두 차례의 불을 뿜었고 승후는 가슴으로 벌건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려졌다. 나머지 두 사람도 총에 맞아 하수도에 버려져 가족들이 그들을 찾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려야 했다... 총소리를 듣고도 얼어붙은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집안의 사람들은 요란하게 철수하는 군인들의 소리가 멀어진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군 사이에 있었던 교전에서 불탄 트럭이 빗속에서도 아직 그 불길이 가시지 않고 타고 있었다. 그 곁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쓰러진 이의 밑으로는 빗물에 섞인 핏물이 도로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멀리서는 그 얼굴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아 가까이 가보고서야 알았다. 빗물에 젖고 있는 그 얼굴은 승후였다.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애타게 “승후야!"를 부르고 또 불렀지만 시신은 축 늘어진 채로 아버지 가슴에 안기지도 못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권근립(權根立) 묘역번호: 2-15 생 애: 1955.01.21 ~ 1980.05.24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송하동 집앞 노상 기 타: 공원 유 족: 권변산(부) “우리 집에서만도 세 명이나 죽었어. 아조 난리가 나부렀당께. 내가 하도 짠해서 그놈(아들 권근립) 제사를 꼭 챙겨줘. 벌써 많은 세월이 지났는디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오장이 뒤집힐라 해서 죽겄당께. 데모나 열심히 허다 그랬으믄 덜 원통허것는디, 가만히 있는 사람을 끄집어내다 죽인 것을 생각허믄, 분통이 터져 환장허제.” 그날은 광주 시내에서 난리가 나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송암동 철로변에 세 들어 살았던 어머니 김금순 씨는 점심을 먹은 후 집안일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집 앞 큰길에서 전쟁이 난 것처럼 총소리가 들려왔다. 온 집안 식구들은 이리 저리 피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금순 씨는 그때 대문 옆 문간방에 숨어 있다가 총알이 그 방까지 날아들자 지하실로 숨었다. 총소리가 잦아들자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화장실이며 방안을 다 뒤집어 놓았다... “시상에 농에 있는 이불까지 끄집어내놨드랑께. 근디 아무리 봐도 아들이 안 보이데. 오메, 가슴이 콩 내려앉드만, 공수들이 집에까지 들어와서는 아들을 끌고 갔는개비여. 옆방에 살던 청년들(임병철, 김승후)도 같이 없어졌어. 온 집안을 다 살피고 밖으로 나가 아들을 찾아 헤매는데, 그때부터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승후는 철로 변에 죽은 시체로 버려져 있고, 우리 아들은 신작로 옆 도랑에다 병철이랑 나란히 죽여놨드만. 병철이는 총에만 맞아 죽었는디, 근립이는 총도 맞고 손을 대검으로 짓이겨 놨어. 아이고, 징허고 끔찍해서 그 형상은 말로 다 못해. 우리 아들이 그때 나이 스물여섯이었어도 좀 어려 보였어. 얼굴이 훤하니 인물이 참 좋았거든. 그래서 더 학생같이 보였는가 어쨌는가 그 꼴을 맹글어놨네 글쎄.” 김금순의 아들 권근립은 2년 동안 포항에서 직장을 다니다 광주에 난리가 났다는 소리 듣고 부모의 안부가 걱정되어 광주에 와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변을 당한 것이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강정배(姜貞培) 묘역번호: 2-14 생 애: 1952.01.07 ~ 1980.05.23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북구 운암동 광주변전소앞 노상 기 타: 미장공 유 족: 강정환(형)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당가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못허게 여기고 징허게도 두들겨 팬당게요. 참말로 나쁜 놈들이여.” 기동성이 있어 편하다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시내를 오가는 동생을 보면서도 정환 씨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옷을 탈탈 털고 별일 없었다는 듯이 들어서는 정배 씨는 계엄군의 피의 살육전이 벌어진 21일에도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그렇기에, 그날 이후에는 더더욱 걱정할 것이 없었다. 23일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그가 시내를 돌아다니다 밤늦게 술을 한 잔 한 후 총을 맞고 운암동 변전소 안으로 옮겨져 가는 그 시각에도 가족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지 않은 23일도, 그 다음날도 가족들은 염려하지 않았다. 워낙 열심히 시위하던 사람이라, 도청 어느 곳에서 자리를 잡고 사태수습을 위해 애쓰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27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입성했고 도청이 함락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배 씨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때서야 형 정환 씨는 ‘아, 정배가 죽었구나!’라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좌측 가슴에 관통상을 당한 정배 씨는 살아있는 채로 변전소 안으로 옮겨졌지만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었다.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손 써주는 사람 없이 밤새 피를 흘리며 신음하다가 새벽녘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진 정배 씨를 천변 둑에 버려두고 계엄군은 철수를 해버렸다.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또 함부로 버려 둔 채 떠나버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 찾아, 형제를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헤맬 가족들의 마음 따위는 그들의 머리에 없었다. 눈이 짓이겨지도록 흐르는 눈물 따위를 생각할 가슴이 계엄군들에게는 없었다. 정배 씨를 검시하던 검시관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은 것이라고, 지혈만 제대로 했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어디에 대고 정배를 돌려달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그곳을 알 수 없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황호걸(黃鎬傑) 묘역번호: 2-13 생 애: 1960.10.07 ~ 1980.05.23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지원동 화순간 도로상 기 타: 학생(방송통신고 3학년) 유 족: 황길현(부) 며칠씩 돌아오지 않고 있던 호걸이 21일 밤이 늦어서 총 한 자루를 들고 들어왔다. 가족들은 총을 든 호걸을 보고 더럭 겁이 났다... “나도 사람들하고 데모했어라. 아부지, 전두환이를 몰아낼라믄 우리도 총이 있어야 써라. 저놈들은 더 좋은 총으로 우리를 막 죽인디 우리는 그냥 당하고만 있으라고라?” 황호걸은 시신을 확인하러 오는 가족들을 안내하며 처참하도록 일그러진 시신들의 몸을 닦아주는 일을 맡았다. 피와 오물로 뒤범벅인 채 썩어가는 시신들에 비위가 뒤틀릴 법한데도 호걸과 다른 학생들은 그저 안타깝고 애통한 마음으로 정성껏 시신을 닦아주었다... 넘쳐나는 시신으로 관이 부족했다. 광주에서 퇴각한 계엄군이 시 외곽에 주둔해 있어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으나, 이 땅의 민주의 제단에 바쳐진 애처로운 넋들을 관에도 넣지 않고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관을 마련하기 위해 황호걸을 포함한 몇몇의 학생들과 시민군들은 작은 버스에 함께 타고 화순을 향했다... 그들이 화순의 입구인 지원동에 도착했을 때, 매복해 있는 군인들은 그 버스를 향해 사정없는 일격을 가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시민군은 보이지도 않는 군인들을 어쩌지 못했다... “내가 우리 아부지 성격을 받았는디, 그놈이 꼭 나랑 같어. 내 맘에 맞지 않으믄 그냥 확 일어나는 성미라서 나를 감시허는 형사도 겁나게 힘들었을 것이여. 그래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제.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있으믄 그것이 사람인가?”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시다 국가유공자로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된 황병학 선생의 아들 호걸의 아버지 황길현 씨는 그렇게 삼대가 불의에 응하지 않고 정의를 지켜온 것이 자랑스럽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장하일(張夏日) 묘역번호: 2-09 생 애: 1942.01.15 ~ 1980.05.23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대 병원 기 타: 노동자 유 족: 장하연(형) 울리는 총소리에 뒤로 돌아 몇 걸음이나 떼어 놓았을까. 뒤따라 와야 할 형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장하연 씨는 순간 심정이 멎는 듯 했다. 돌아보니 형의 배에서 피가 품어져 나오고 있었다. 형이 바닥에 피를 흥건히 쏟아내고 필사의 힘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손에서도 피가 났다. 총알은 하일 씨의 손을 스치고 그의 등을 뚫은 것이다. 망연하지만, 그렇게 놀라 서 있을 새가 없었다. 하연 씨는 옆에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형을 부축해 질질 끌면서 피가 낭자한 길을 걸어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그 사이에도 금남로의 총성은 멎지 않았다. 죽음의 거리였다... 하일 씨는 수술을 끝내고도 이틀을 견뎠다. 비록 온전하지는 못했지만 흐린 정신이나마 있었고, 혼자 남겨질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어쩔 줄 몰랐다. 하일 씨와 하연 씨는 단 둘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생활했던 그들은 담양에 있는 고모네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재단 일을 배웠다. 재단사로서 일하는 사이에도 그는 강원도 태백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종교활동을 했다. 그는 결혼도 포기했다. 신부가 되고 싶었다. 동생은 광주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형은 서울에서 일과 봉사 생활에 충실했기에 서로 자주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 안타까웠던 하일 씨는 동생과 단 얼마간이라도 함께 지내고 싶었다... 하일 씨는 1980년 초에 광주에 내려왔다. 그리고 5월이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푸르른 오월의 하늘과는 너무도 다른 광주의 날들에 하일 씨는 매일 시내로 나갔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가만히 앉아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인생 설정 또한 없었을 것이다. 공수들의 모든 것을 보아버린 하연 씨는 매일 밖으로 나가는 형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말려질 사람이 아니었다. 걱정이 된 그는 상황이 급격해진 21일에는 형과 함께 나섰던 것이다. 도망갈 수도 빌 수도 없었다. 총알이 휙휙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음식을 나눠먹은 내 형제들이었다. 적진이 아닌 내 나라 땅 광주 시내의 한복판에서 내 나라 군인이 정조준한 총을 겨눌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총격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하일 씨도 하연 씨도 폭도였다. 그해 5월의 비극은 폭도라는 오명을 그들 형제에게 지워줬고, 정보과에서는 언제나 하연 씨를 미행하고 감시했다. 다른 형제가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부모의 어느 한 쪽이라도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면 그처럼 황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 하연 씨는 완전히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의 외로움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게 했다. 무엇으로도 형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그들의 죄가는 분명히 치러져야 했다. 하연 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이 없어도 세상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도 돌아갔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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