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린[玄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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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은행나무 마을 낡은 벽을 따라 거미줄처럼 이어진 좁은 골목길 곳곳에서는 화장실 냄새가 코를 지른다. 50년 전 만들어질 당시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하는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 대부분은, 중국 조선족이나 동남아국가 출신 노동자들을 포함한 세.입.자.들이다. 20년을 끌어온 재개발 사업이 곧 시행될 단계에 들어섰지만, 주택재개발이 아닌 도심재개발 지구로 재개발계획이 발표됨에 따라, 3-40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실제 거주자들은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쫓겨 날 신세가 되었다. 주민들은 있는 자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에 분명하다며 답답한 심정을 털어 내고, 그 흔한 기자 양반 하나 찾아 오지 않는 무관심에 안타까워 했다. 나이 300년을 넘게 먹은 은행나무 한 그루와 함께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미 이 마을을 둘러싸고 우뚝 서 있는 고층 아파트의 기세에 뒤지지 않는, 고급스러운 주상복합빌딩들이 들어서게 될 것이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인가? 2004년 10월 서울 용산 은행나무 마을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51245&v=N
[륜:輪]
[륜:輪]
1118 1. 길고 긴 싸움 끝에 결국 땅을 빼앗긴 분들의 마을잔치에 다녀왔다. 대추리 가는 길이 이리 편했던 적이 없었다. 기지가 들어서면 미군들의 거주지가 될 For U~ 빌라촌에서 벌어진 대추리 마을잔치, 12시부터 잔치 시작이라더니 11시부터 벌써 고기 굽고 계시더라. ^^ 징하게 추웠던 날, 징하게 놀다 왔다. 그분들 노래가락과 춤사위 흥겨운 만큼 그 아픔 큰 줄도 알겠더라.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은 정작 시작도 않는 우린 줄도 알겠더라. 2. For U~~ 네 U가 어느 U인지는 분명할 터 이제 곧, 주인 어른 납시니 또 집 비우라 하실 터 그때에 다시 민간인이라 출입 못해도 좋으니, 옥토 뺏으며 약속한 집과 땅이나 잊지 마~~소. 20071118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50182&v=N
1111 어제 술자리 파한 후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종로 일대에는 벌써부터 경찰 병력이 배치되고 있었다. 광화문에서부터 서울광장까지 겹겹이 겹겹이~~ 마치 빼빼로 쌓기 놀이라도 하신 모양~~~ 이 지랄을 해 놓고는 교통혼잡으로 시민생활에 불편을 줄 수 있으므로 집회를 불허하시겠단다. 시민의 안전을 이리 걱정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ㅠ ㅠ 그려 오늘, 100만 민중대회가 있었다. 빼빼로 입에 물고 빨고 다니는 청춘들, 혹시 아시는가, 오늘이 "농민의 날"이라는 사실을? 빼빼로로 만든 하트 품에 안은 청춘들도 아시겠지? 인간은 빼빼로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려 오늘, "빼빼로 대신 자유!"가 아니라 밥과 일을 지키려고 전국에서 싸움을 벌였다. 미친 신자유주의의 머슴들이 겹겹이 쌓은 성벽을 허물고 넘기 위해, 민중은 사다리까지 동원했고, 빼빼로 못 먹는 것도 서러운데 추운 날 이 지랄하는게 짜~~증났던지, 또 한 무리의 청춘들은 참 눈물겹게 충직스럽게도 열심히 방패질 했다. "우리에게 휴가가 아니면 빼빼로를 달라~~ 빼빼로를 달라~~ 빼빼~~ 패패~~" 아~ 난 참 고운말 이쁜짓 사랑하는 사람인데... ㅡ ㅡ 정리집회가 끝나고, 대학원 시절 교육 문제로 함께 고민하던 전교조 위원장 정진화 선생을 잠깐 뵀다. 선하고 선한 선생들을 투사가 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이 지랄같은 세상에, 선생님의 손이 무척 크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놔~ 집에 돌아오는 길, 끝도 없이 눈에 띄는 저 지랄같은 빼빼로!!!!!!!!!!! 20071111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50069&v=N
홍순권(洪淳權) 묘역번호: 2-52 생 애: 1960.11.28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재수생 유 족: 홍순백(형)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도청 앞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었고, 시민군의 총에 서치라이트가 박살났다.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폭도’들이 그날 새벽 도청 안에서 카빈총을 들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홍순권은 27일 새벽 도청에서 다른 벗들과 형들과 함께 생을 마쳤다.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실패한 그는 재수를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다니던 북동성당에 꾸준히 나가며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하며 일찍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의 농촌의 가난과 피폐가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에서 오는 것이며, 개발정책이라는 것이 값싼 노동력을 위해 농어촌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군부와 족벌 중심의 정치체제로는 어떤 진보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 전두환 등의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광주를 처참하게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 그는 매일 시위현장을 쫓아다니며 광주시민들에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위해 함께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20일 이후부터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21일 계엄군의 일시 퇴각이 이루어지고 홍순권은 도청의 수습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도청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시내상황이 궁금했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시민군의 차에 타고 ‘신군부 타도’를 외쳤던 그때, 홍순권의 형 홍순백 씨도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도청에 있는 동생을 보았다. 동생이 걱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을 지르기도 했다.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던 동생이건만, 굳건한 자신의 철학을 가진 순권은 말을 듣지 않았다... 순권이가 죽었으니 망월동에 가서 시신을 확인하라는 연락이 아버지에게로 왔다. 직장에 나가고 없는 아들을 대신해 순권의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누나와 매형이 망월동으로 달려가 순권의 죽음을 직접 확인했다. 순권은 총을 들고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있던 폭도라 했다... 형 순백 씨는 1년 넘게 동생의 무덤에도 찾아가지 못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어떤 세력이 자신에게 달려든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그는 몸을 사렸다. 그래서 동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도 함께 해줄 수 없었다. 미안하고 죄스러웠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집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경찰들을 본 이웃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저 집은 빨갱이 집인 갑다. 어째 경찰들이 저렇게 맨날 있다냐?” “빨갱이 짓을 한 놈이 있는 갑다.” 1981년 어느 날 그는 망월동을 찾았다. 혼자 외로이 떨고 있는 동생을 찾아가 위로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더 미루면 동생이 자신을 야속한 형이라고 탓할 것만 같았다. 순권의 무덤 앞에 엎드린 형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옷소매로 훔쳐내고 손등으로 닦아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순권아, 네가, 네가…. 형이 잘못했다. 인자서 찾아와서 미안하다, 순권아. 형 원망 많이 했지야? 미안하다. 아이고, 아까운 내 동생. 어찌끄나, 어찌끄나…. 너 같이 착한 놈을 누가 폭도라고 한다냐? 순권아 이놈아 대답 좀 해봐라. 어째서 폭도로 몰려서 이러고 가만히 있냐? 인나보란 말이다 이놈아, 이 나쁜, 나쁜 놈아. 아이고, 어무니, 우리 순권이 좀 지켜주지 그랬어라. 좀 살려주지 왜 벌써 데려갔소. 아이고 어무니!”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에필로그] 숨막히도록 조여드는 가슴 쓸어내리며 백여덟 분의 자취를 따라 오는 동안, 한없이 초라한 욕망들이 부끄러워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몫이란 것이 탄식과 자조 속에서의 추억함만이 아님을 알기에, 그 치욕스러운 시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탄식과 자조를 넘어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고 싶었습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그 치욕 속에서 해방에의 열정으로 거대한 적에 부끄럽지 않게 맞섰던 그해 오월의 당신들,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뜻을 함께 해주신 분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정연(李正然) 묘역번호: 2-50 생 애: 1960.02.15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전남사범대학교 2학년) 유 족: 이천균(부) “아버지, 우리는 잡초가 무서워 지금까지 방치해왔어요. 아버지도 방치하셨습니다. 이제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잡초를 뽑아야 할 것 아닙니까.” 5월 18일부터 어머니의 가게가 있는 대인시장 안에까지 공수부대가 들어왔다. 집집마다 수색했고 청년들을 구타하고 끌고 갔다. 대학생인 자식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던 아버지는 정연이를 앉혀 놓고 집에 있으라고 타일러야 했다. 그랬더니 하는 소리가 잡초에 대한 이야기였다... 5월 22일, 광주는 잠깐 동안이지만 해방의 공간이 되었다. 도청 앞에서의 참혹한 학살을 뒤로 한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퇴각을 하고, 광주시민들은 죽음의 잔해를 수습하고 있었다. 정연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잘 지내는가 싶더니 25일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24일은 정연의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정연은 그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할아버지의 제사나마 마지막으로 참석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가톨릭센터에 볼 일이 있으니 한 시간 후면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간 정연은 그대로 도청으로 들어갔고 수습위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을 뚫고 진격해온 공수들의 총을 피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역사의 오욕을 받아들이면서 숨져갔다... 정연이는 전남대학교 상업교육과를 다니다가 일을 당했다. 가끔씩 어머니를 찾아오는 그의 벗들은 모두 졸업 후에 고등학교에 배정되어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산다. 그 친구들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더욱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착하기만 했던 아들은 죽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저들은 저렇게 행복하구나’하는 생각에 미치면, 먼저 떠난 아들이 몹쓸 불효자식이라는 억지스런 마음도 생겼다. 이제 다 부질없는 줄 안다. TV에서 본 아들의 모습도 다시는 볼 수 없고, 역사는 아직 학살자들을 심판할 마음이 없는지, 여전히 세상은 그대로다. 어머니는 바람도 없다. 아들이 말한 잡초가 아직 너무도 잘 자라고 있으므로 참으로 허망한 세월이었나 싶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Pyeongtaek] 03: 대추초등학교 2006년 가을운동회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46749&v=N
이강수(李康守) 묘역번호: 2-48 생 애: 1961.04.08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대입 재수생 유 족: 이운환(부) 금호고를 중퇴하여 검정고시에 합격한 이강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하고 있었다. 그는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평소성격이 활달한 그는 친구가 진압봉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시위에 참여하여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동안에도 날마다 집에 전화를 했다. 도청 안에 있었던 이강수는 5월 26일 저녁에도 집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 잔인한 진압작전이 펼쳐진 5월 27일 새벽, 일단의 총성이 광주를 뒤흔들어 놓은 후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증명을 가지고 있으니 죽어도 확인이 가능할 거라고 농담으로 건네던 말이 유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 이문환 씨는 며칠이 지난 후에야 보안대의 연락을 받았다. 지문조회를 통해 아들의 시신을 확인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6월 2일쯤 검찰청 8호 검사실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들을 확인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친 후 경찰서에서 확인이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망월동으로 갔다. 아들은 오른쪽 가슴에서 겨드랑이로 총알이 관통한 구멍이 뚫려 있고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주검을 앞에 두고도 마음대로 울 수 없었다. 아들의 시신을 부패시킨 햇살만큼이나 따가운 고통이 아버지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강수의 동생 광준이도 5월 27일 광대뼈에 총상을 입고 고통을 받고 있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Pyeongtaek] 03: 대추초등학교 2006년 가을운동회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46749&v=N
류영선(柳英善) 묘역번호: 2-46 생 애: 1953.05.09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앞 기 타: 학생(전남대학교 공과대학 2학년) 유 족: 신애덕(형수) 21일, 도청에서 집단발포가 있었고 광주 전역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아침에 나갔던 막내아들이 노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섰다. “엄마! 도청에서 군인들이 막 총을 쏘는디 얼마나 잘 맞추는지 몰라. 한방에 사람 목이 떨어져버렸어. 어디서 쏘는지도 모르겠는디 탕 소리가 한번 들리고 나면 장갑차 위에 있는 사람의 목이 앞으로 굴러 떨어지대. 징헌 놈들이여. 삼촌은 Y에 있어. YMCA에. 내가 삼촌 자전거 타고 왔어.” 1980년 당시 류영선은 전남대 화학공학과 2학년에 다니다 휴학한 상태였다. 넷이나 되는 조카를 혼자 돌보는 형수에게 자신의 등록금까지 부담하게 할 수 없어 2학년 때 입대했었다. 그리고 제대해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형수가 등록금을 마련했으니 복학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는 어서 8월이 오고 복학 절차를 밟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조카가 연행되고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다. 아들의 처참한 시신에 어머니가 정신을 잃고, 남편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 아내가 미친 듯이 시내를 쓸고 다니며 사라진 이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학생들이 몽둥이에 처참히 일그러졌다. 청년들이 생존을 위해 군인들의 군홧발에 무릎을 꿇는 비참한 광경이 그를 괴롭혔다... 26일 류영선은 집에 전화를 걸었다. 담배를 살 돈이 없다며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 막내조카 식이 3천 원을 들고 삼촌을 만나러 왔다. 담배값은 핑계였고, 자신의 뜻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식아, 오늘 저녁에 군인들이 다시 쳐들어온단다. 아무래도 오늘 삼촌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삼촌 자전거 타고 집에 가라. 그리고 오늘은 절대로 시내에 나오지 말아라. 형이나 누나도 나오지 못하게 해라 알았지? 얼른 가라.”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다. ‘폭도 마지막 저항자 17명’이라는 머릿기사 아래 5월 27일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죽음으로 저항했던 이들이 폭도라는 이름으로 명단에 올라있었다. 명단의 맨 끝에 ‘류영선’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폭도라고 했다. 사망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폭도라고 했다... 왼쪽 허벅지에 총에 맞은 자국이 있고, 이마 한가운데에 조그만 총구멍이 나 있었다. 허벅지에 총을 맞고 쓰러진 그에게 이마의 총상은 확인사살이었음이 분명했다. 이마를 관통당해 시신의 뒷머리가 없었다. 가지고 갔던 탈지면을 뒤통수에 대주었다. 손이 쑤욱 들어가는 시동생의 머리를 가슴에 안은 신애덕 씨는 오열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땅을 치는 통곡이 이어졌다. 묘지의 곳곳에서 그녀처럼 주저앉아 가는 이의 서러운 넋을 눈물로 보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에 더욱 안타깝고 가엾기만 했다. 학교에 복학할 등록금이 그의 장례비가 되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Pyeongtaek] 03: 대추초등학교 2006년 가을운동회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46749&v=N
류동운(柳東雲) 묘역번호: 2-45 생 애: 1961.01.01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대학생(한신대 1학년) 유 족: 류연창(부) 1971년 광주에 와서 목회를 시작한 아버지 류연창 목사는 반유신운동에 앞장서다가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류동운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당한 국가권력이 아버지를 탄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분명한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류연창 목사가 1976년 이른바 광주교육지표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아들 동운도 함께 연행되었다. 아들의 책상에서 불온한 유인물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까지 연행하여 고생시키는 것에 항의하여 3일 동안 옥중 단식투쟁을 했고 결국 3일만에 아들은 풀려났다. 광주 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신대에 진학한 동운은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가 5월 20일 계엄군에게 붙잡혀 연행되었고 22일 석방되었다. 집을 나가서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식구들이 걱정하며 찾아 헤매던 차에 들어온 동운은 머리에 상처가 나 있었다. 집에서 하루를 쉰 동운은 다시 시내로 나갔다. 전남도청에 들어가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당시 전남도청에서 활동하던 수습대책위원회는 이른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사태해결의 방법에 극명한 노선 차이가 생겼다. 동운은 그 중에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사태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투항하는 것이므로 결코 안 된다는 입장에 섰다. 끝까지 항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도청에서 활동하던 수습대책위는 온건파 위원들이 나가게 됨으로써 조직이 재편되고 계엄군과 마지막까지 항쟁하기 위한 준비를 청년들 중심으로 진행하며 자체적으로 광주의 치안질서 유지와 사상자들의 처리 등을 분담하여 자치체제를 꾸려가기 시작했다. 5월 23일 아버지 류연창 목사는 도청에 들어가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광주의 마지막 상황을 예감한 아버지는 아들이 더 이상 나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동운이는 결심이 굳어 있었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나가지 마라, 나가면 죽는다”며 만류해 보았다. 그러자 동운은 “아버지, 아버지가 하신 설교와 생각이 바뀐 것입니까? 신념이 바뀌면 안 됩니다. 아버지! 이럴 때일수록 신념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라고 자신의 뜻을 분명히 했다. 자신이 주일 설교에서 “정의가 죽어갈 때 누군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진리와 역사와 정의를 위한 희생을 주문했던 내용이 아들 동운에게 용기와 힘을 준 것이었다... 5월 26일 이제 계엄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최후통첩이 전해졌고 모든 전화마저 두절되었다. 이날도 아버지에게 동운은 그 소리를 반복하고 나섰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분명한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집을 나가면서 쓴 글에는 ‘나는 이런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내가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날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Pyeongtaek] 03: 대추초등학교 2006년 가을운동회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46749&v=N
염행열(廉幸烈) 묘역번호: 2-43 생 애: 1963.11.22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전남 보성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기 타: 검정고시 준비생 유 족: 김동순(모) 전남 보성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염행렬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금호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두고 광주에서 자취를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금호공고는 시골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모든 학비와 숙식을 제공하고 직업교육을 시키던 교육기관이었다. 염행렬 역시 시골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는 편에 속했고 넉넉하지 못한 농촌살림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금호공고로 진학을 해야 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행렬의 활동은 그 후 행렬의 친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행렬은 처음부터 시위에 적극 가담했고, 계엄군이 퇴각한 이후에는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친구들은 머리띠를 두른 채 장갑차에 올라타 시위에 참여하는 행렬의 모습도 전해주었다. 그리고 염행렬이 사망한 곳이 계엄군의 충정작전이 자행된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후문이었다는 것이 사망 검시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항쟁에 참여하여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스스로 장렬한 죽음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Pyeongtaek] 03: 대추초등학교 2006년 가을운동회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46749&v=N
안종필(安鐘必) 묘역번호: 2-41 생 애: 1964.05.28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광주상업고등학교 1학년) 유 족: 이정임(모) “엄마, 학교에서 나오라네.” 학교에 안 가도 된다던 아이가 학교에서 다시 등교하란다고 교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책가방을 옆에 끼고 집을 나가는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시청 근처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종필이는 그렇게 한 마디 하고 불러 세울 틈도 없이 나가버렸다.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는 아이는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니 신역 쪽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시꺼멓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더러 각목이 쥐어져있었다. 혹시 종필이가 있을까 눈을 크게 떠봤지만 교복 차림의 아이들은 다 똑같아 보였다. 그때 학생들 대열에서 툭 튀어나온 한 아이가 인도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 모자를 안겨주고는 도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종필이었다... 24일경, 집 앞 산수오거리에 나섰다. 총을 메고 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차체를 두들기며 큰소리로 뭐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소리는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였다. 유심히 살피던 어머니 눈에 종필이가 보였다. “아야 종필아! 종필아 얼른 내려라. 얼른 내려!” “엄마, 나 도청 들어갔다가 금방 갈게. 얼른 집에 들어가 있어.” 계엄군이 물러나가고 며칠 동안 해방의 공간으로 활기를 더해가던 광주에 계엄군이 다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6일 밤, 광주는 죽음을 기다리는 듯 암울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도청을 지켜내겠다는 결의를 꺽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것이 비록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도청을 내주고 나올 수는 없었다... 집보다는 식당에서 주로 숙식을 해결하는 어머니를 돕겠다며 편안한 집을 놔두고 식당에서 불편한 잠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깨끗이 해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가던 종필이는 학교에서도 급우들의 기분을 밝게 해주던 아이였다. 친구들 간에 다툼이라도 일어날 것 같으면 종필이는 얼른 엉뚱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어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종필이 떠났을 때 찾아왔던 급우들은 “종필이가 웃기는 바람에 반에서 싸움을 할 수가 없었다”며 멋진 녀석의 죽음을 한탄했다. 밝고 구김이 없던 종필이의 성품은 집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형제들의 기분을 맑게 해주었다. TV에서나 책에서 보았던 캐릭터들을 이용해 넉살을 부리는 종필이는 누나가 교회에 간다고 준비하고 있으면 얼른 밖에 나가 누나의 구두를 깨끗이 닦아놓고 헤헤 웃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Pyeongtaek] 03: 대추초등학교 2006년 가을운동회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46749&v=N
서호빈(徐豪彬) 묘역번호: 2-40 생 애: 1960.11.05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여수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전남대학교 2학년) 유 족: 서삼봉(부) “없어라. 학생들 다 나가고 암도 없단 말이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는 아주머니는 그렇게 둘러댔다. 금방이라도 화장실 문으로 달려들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다행히 공수들은 총을 거두고 그냥 돌아서서 나갔다. 한숨을 내쉬며 나오는 서호빈은 모든 것이 기가 막혔다. 이렇게 숨어 있기나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 서호빈은 시내로 나갔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에서 빠져나간 상황이었지만 총탄이 휩쓸고 간 시내 곳곳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신을 보았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시신 한 구가 그의 눈앞에서 사람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앉아서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신의 희생이 국난에 처한 나라에 작은 보탬이 된다면 한 몸 기꺼이 바치겠노라는 그의 일기처럼 그는 도청에 들어가 수습위로 활동했다. 함께 하숙을 했던 친구와 상무관에 있는 시신의 입관과 분향을 도왔다. 그리고 그는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계엄군과 싸우기로 다짐했다... 서호빈은 여자친구의 애원을 뿌리쳤고, 노영희는 혼자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남자친구와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도청에 놓아둔 채 새벽의 총성을 들어야 하는 그녀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27일 밤새 울리던 총성이 멎었고 어김없이 아침이 왔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박용준(朴甬準) 묘역번호: 2-38 생 애: 1956.07.09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광주 YMCA 부근 기 타: 회사원(고아) 유 족: 김경천(기념사업 사무총장) 5.18 민중항쟁 당시 언론은 모든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했다. 광주 문제를 지역적인 문제로 국한시켜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신군부의 음모였다. 이에 광주시민은 가두방송을 실시, 범민족 궐기대회 개최, 투사회보의 배포 등을 통해 전국민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 만행과 사태의 진상을 시민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항쟁을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한 노력은 선전활동으로 시작했다. 전남대학교의 탈춤반과 농악반, 연주반 출신이 만든 문화운동팀인 ‘광대’와 광천동 천주교회 ‘들불야학’의 학생과 강학들에 의해 궐기대회가 준비되고 투사회보가 제작 배포되었다. 박용준은 들불의 강학으로 학생들, 동료강학들과 함께 투사회보 팀에 가담하였다... 들불야학의 학생 대부분은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었다.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자신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어리고 순진한 그들에게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들불야학에서는 교재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기본적인 생활지식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키울 수 있는 공부가 필요했다.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정당하게 주장해야 할 자기의 몫을 알게 해주었다. 교사와 학생이지만 그들은 이미 형제였고 동지였다. 그들은 함께 나섰다... 26일 밤 투사회보 팀은 신문발행을 중단했다. 이제는 총을 들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들은 미처 돌리지 못한 투사회보를 보듬고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도청에서 총기를 지급받아온 이들은 YMCA에서 총을 들고 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나님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당신 앞에 내놓겠습니다. 저는 너무 가냘픈 존재입니다. 그리고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 큰 고통과 번뇌와 시련을 듬뿍 주셔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고아라면 모두들 이를 갈겠지요. 내 형제들, 어린 동생들, 이렇게 죽는 나로 말미암아 두 겹, 세 겹의 고통과 멍에를 짊어지고 쓰레기로 태어나 쓰레기처럼 살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지요. 하나님,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심이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십니까? 그렇다면 하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무거운 짐을 진 형제들을… 사랑과 관용을…” 총을 들고 어린 동생들을 위로하면서 그는 기도를 올렸다. 자신과 같은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어리고 가엾은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기도하는 것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갔다. 고아로서 겪었던 외로움과 서러움을 떠올리며, 다시는 자신과 같은 아픈 생을 사는 이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한 몸 역사의 제단에 바쳐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세상의 짐을 그 작은 어깨에 싣고 떠났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박성용(朴成龍) 묘역번호: 2-37 생 애: 1963.01.26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 유 족: 김춘수(모) 성용이가 세상을 떠나고 밥보다는 술을 더 많이 드시며 당신 몸을 학대하시던 아버지는 1982년 어느 날, “아들 대신 당신 목숨을 내놓고 싶으시다”는 말씀을 되뇌시다 끝내 숨을 거두셨다. 성용이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는데, 그런데도 아버지는 성용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돌아오지 않을 아들이라면 당신이 찾아가겠다는 결심을 하신 게 분명하다... 서울 종합청사 앞에서 어머니는 플래카드를 몸에 두르고 누워버렸다. 남은 것은 오로지 강한 증오심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누워버린 어머니를 개처럼 끌고 경찰서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도대체 5.18이 무엇인지, 이 여인들이 거칠게 항거하는 이유를 그 경찰들은 알지 못했다. 도리어 반문했다. “어떻게 우리나라 군인들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요? 저희는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정말 거짓말 같습니다.” 최루탄이 옷으로 떨어져 아들을 위해 입은 하얀 한복이 불에 타고, 허벅지는 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밥보다 많이 마신 최루탄 가루로 인해 위가 뒤틀려도 어머니는 멈출 수 없었다. 늘 지끈거리는 머릿속에서도 한 가지 선명한 생각은 폭도로 몰린 아들의 명예회복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군인의 총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그해 5월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의무로 어머니는 그 힘든 시련을 견뎠다... 성용이는 학동 파출소가 불타는 것을 보았다. 시민의 지팡이가 되어줘야 할 파출소가 불타야 하는 이유를 성용이는 보았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3학년이지만 그 아이는 분을 견디지 못했다. 공수부대가 함부로 사람을 때리고 함부로 죽이는 것을 보고 울분을 토해냈다... “광주역에서 공수부대가 사람들한테 총을 막 쏘았어요. 사람들이 총에 맞고, 곤봉에 맞아 죽었어라. 광주공원에 친구가 갔는데, 아무래도 그 친구도 죽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러더니, 자취하는 친구가 걱정이 된다면서 26일 잠깐 들러봐야겠다며 집을 나갔다. 그리고 성용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성용이는 그 길로 도청으로 들어간 것이다. 부상자들과 시신들이 가득한 도청 안에서 대학생 형과 누나들을 도우며 사상자들을 돌보았다. 형들은 성용이에게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성용이는 도청을 빠져 나오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그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름다운 한 떨기 꽃송이는 피지도 못하고 지고 말았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박병규(朴炳奎) 묘역번호: 2-36 생 애: 1961.05.04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동국대학교 1학년) 유 족: 김양애(모) 정국이 어수선하던 80년대에 병규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끊이지 않더니 결국은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에는 계엄군이 들어섰다. 어머니는 혼란한 시국에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는 자식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전화를 해 광주에 내려오게 했다. 5월 19일 병규는 저녁차를 타고 광주에 왔다. 터미널까지 차가 들어오지 못하고 광주역 근처에 내린 병규를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을 나가 데려왔다. 그렇게 광주에 왔던 병규는 다음날로 시내에 나가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광주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과 함께 병규는 5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이어지더니, 시민들의 거센 저항의 힘으로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고 도청을 접수한 이후에야 두어 번 집에 들어왔다... 도청이 다시 함락되기 며칠 전에 병규는 한 번 더 집에 왔었다. 피곤하고 지쳐 추레한 행색이었지만 눈빛만은 강하게 살아 있었다. 가족들은 병규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아온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도청 지하나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을 확인해서 가족들한테 안내해 주기도 해. 한번은 사망자의 형이 왔는데, 시신이 하도 험하게 일그러져서 얼굴로는 확인할 수가 없는 거야. 동생이 자기의 교련복을 입고 나갔다면서, 시신이 입고 있는 교련복 바지를 벗어서 입어보고는 동생이 맞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거야.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 많은지 몰라. 또 무기를 회수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총을 안 내놓으려고 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무기를 내놓고 항복을 하냐며,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말야. 광주 사람들 다 한 마음일 거야.” 활달한 성격의 어머니와 여동생 경순도 시내에 나가 시위를 지켜보아 알고 있었다. 어머니 자신도 돈을 보태어 시위대에 김밥을 나눠주고 빵을 나눠주었다. 병규의 말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아들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사망자 명단에 병규의 이름이 있었다. 상무관 안에 병규의 이름이 적힌 관을 여니 거기 아들이 누워있었다. 제 형의 밤색 바지를 입고 가슴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죽어 누워있는 아들이 거기 있었다. 해방공간이 되어 들떠있던 광주의 시민들에게 다시 이런 비극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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