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방을 정리하다 오래 전, 옛 연인과의 기억을 남겨둔 일기장을 발견했다. 아내가 볼까 하는 묘한 두려움과 추억의 망설임 속에 고민하다 조심스레 일기의 한 장 한 장을 찢어 분쇄기로 밀어 넣었다. 글자가 남아 있던 마지막 추억을 밀어 넣고선 남은 공간에 천천히 현재의 나를 남긴다. 사람이 만든 수많은 단어들은......그래, 수많은 단어들은 사람의 세세한 마음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표현할 수는 없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가끔은 겨울 눈처럼 모호한 의미들이 뭉쳐 하나의 단단한 눈뭉치 마냥 단어 안에 꽁꽁 숨어 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단어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마음을 뒤 흔든다. 오래 전 추억을 뭉뚱거려 정리하고 분쇄기에 하나하나 밀어 넣곤 그 부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게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다. 문을 열고 나와 몇 초 정도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예전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이 모두 무너졌던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의 슬픔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을 할 청춘은 지났지만, 적어도 그 몇 초 간만은 시간을 달려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젠 울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으며 냉소적이지도 않다. 시간의 두터운 흙으로 이미 그 모든 슬픔들은 깊이 깊이 스며들어 버렸으니까. 좋은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 곁에는 과거의 그 순간에 바랬던 모든 것이 존재한다. 오히려 그대가 아니었음을 감사하곤 한다. 단지 잠시나마 마치 불에 데이고 상처를 입었던 아이가 다시금 불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상념과 슬픔의 무게를 떠올렸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느낀 절망의 나락은 더 이상 곁에 없다. 그 페허의 마지막 흔적 위로 나는 나의 '헛헛함' 을 내려 놓는다. 이 가치없는 헛헛함을 내려 놓는다. - 자작나무[대호] 올림
자작나무
2007-09-28 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