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였던가? 다 큰 사내놈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울며 난리이다. 매일 매일 하는 야간 자율학습과 방학도 없이 진행되는 보충 수업이 지리 해서인지 모르겠다. 사내놈들끼리 어울려 노는 것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는 그 놈 어머니의 생각이다. 어머니가 묻는다. ‘그럼 대학 안 가고 뭐할래!’
그놈 말이 참 가관이다. ‘동숭동 대학로 가서 연극할래!!!’
1994년 대학입시가 수학능력으로 바뀐 지 2년 째 되던 해. WTO인지 뭔지 하는 것으로 동네마다 농부들이 머리에 ‘쌀투쟁’, ‘먹거리 사수’라는 띠를 두르고 서울로 상경할 때. 그 놈은 고 3이 된다. ‘마지막 승부‘에서 심은하가 상종가를 달리고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차인표가 손가락을 흔들며 여심을 자극하고, 청순한 여인의 상징 은하가 눈이 퍼런, 허스키 목소리의 ’M'이 최고 시청률을 돌파할 때, 귀가시계라는 ‘모래시계’의 최민수가 “나!! 떨고 있니?”라고 외치던 그 해 그 겨울 그 놈은 부산 해운대에서 떨고 있었다.
자초지정은 이렇다. 결국 그 놈은 대학을 가기고 했고, 한예종 연극과 지원을 꿈꾸던 중 부모와 학교라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저... 한예종... 연기과 원서 쓰겠습니다.”
“미친놈”
그 날 저녁,
주머니에 딸랑 3만원의 현금을 들고 밤 10시 13분 부산발 무궁화호에 잔뜩 긴장한 양 앉아 있다. 이 놈 혼자 기차 처음 탄다. 그 놈 가출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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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놈은 2박 3일 만에 집으로 돌아갔고, 무사히 3년 개근상을 받으며 졸업을 하고
대학에 들어간다. 연극을 한다. 그것이 그 놈과 연극의 만남이자 이별이 된다.
이게 그놈의 마지막 사진이다.
사진 속에 추억의 무게는 그 때 그 놈의 열정을 올곧이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다.
흔적으로. ‘그랬었지!‘ 하는 아련함 정도의 중량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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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은 지금 선생을 하고 있다. 작은 시골, 소도시에서 매일 거짓말을 하며 하루하루 국가에 빌어먹고 살고 있다. 그래도 그 놈에게 희망하나가 조심히 움튼다.
다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비록 멋진 조명과 관객의 박수갈채 기자들의 스포트와 엄청난 취재경쟁은 없지만, 누구하나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도 없지만 공연은 항상 시작된다. ‘삶이 연극이다.‘ 라는 거창하면서도 진부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소박하게 그 놈의 거짓말을 진실로 믿는, 그렇게 진실을 만들어 내는 아이들과 공연을 한다.
재미는 ? 감동은 ? 글쎄.... 다만 연극이 내게 주었던 꿈의 무게만큼, 연극이 나의 지금의 삶을 지탱해 준 그 버팀목처럼 아이들에게 연극처럼 다가가고 싶다. 호흡을 느끼며 눈을 마주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감동으로 다가가려 한다.
나나 아이들에게나 10년 전 그 놈에게나 여전히 무대는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