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朴炳奎) 묘역번호: 2-36 생 애: 1961.05.04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동국대학교 1학년) 유 족: 김양애(모) 정국이 어수선하던 80년대에 병규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끊이지 않더니 결국은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에는 계엄군이 들어섰다. 어머니는 혼란한 시국에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는 자식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전화를 해 광주에 내려오게 했다. 5월 19일 병규는 저녁차를 타고 광주에 왔다. 터미널까지 차가 들어오지 못하고 광주역 근처에 내린 병규를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을 나가 데려왔다. 그렇게 광주에 왔던 병규는 다음날로 시내에 나가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광주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과 함께 병규는 5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이어지더니, 시민들의 거센 저항의 힘으로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고 도청을 접수한 이후에야 두어 번 집에 들어왔다... 도청이 다시 함락되기 며칠 전에 병규는 한 번 더 집에 왔었다. 피곤하고 지쳐 추레한 행색이었지만 눈빛만은 강하게 살아 있었다. 가족들은 병규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아온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도청 지하나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을 확인해서 가족들한테 안내해 주기도 해. 한번은 사망자의 형이 왔는데, 시신이 하도 험하게 일그러져서 얼굴로는 확인할 수가 없는 거야. 동생이 자기의 교련복을 입고 나갔다면서, 시신이 입고 있는 교련복 바지를 벗어서 입어보고는 동생이 맞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거야.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 많은지 몰라. 또 무기를 회수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총을 안 내놓으려고 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무기를 내놓고 항복을 하냐며,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말야. 광주 사람들 다 한 마음일 거야.” 활달한 성격의 어머니와 여동생 경순도 시내에 나가 시위를 지켜보아 알고 있었다. 어머니 자신도 돈을 보태어 시위대에 김밥을 나눠주고 빵을 나눠주었다. 병규의 말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아들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사망자 명단에 병규의 이름이 있었다. 상무관 안에 병규의 이름이 적힌 관을 여니 거기 아들이 누워있었다. 제 형의 밤색 바지를 입고 가슴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죽어 누워있는 아들이 거기 있었다. 해방공간이 되어 들떠있던 광주의 시민들에게 다시 이런 비극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2007-04-10 0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