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학(文在學) 묘역번호: 2-34 생 애: 1964.06.01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광주상업고등학교 2학년) 유 족: 문건양(부) 며칠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어머니는 25일 도청으로 갔다. “너, 계엄군이 또 들어온단다. 긍게 인자 집에 가자.” “엄마 아무래도 창근이가 죽은 것 같아요. 긍게 창근이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조금만 더 심부름하다가 갈게.” “그러다 너 죽으믄 어찔라고 그러냐?” “안 죽어. 군인들이 들어오면 손들고 항복하면 되지. 긍게 걱정 말고 빨리 집에 가요.” 26일 다시 도청에 갔으나 재학이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 전화가 왔다. “엄마, 인자부터는 밖에 못 나가요. 나, 그냥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온다는 때에는 제주도고 강원도고 할 것 없이 끌려 다니다 돌아왔다. 봉고차에 실려 다니는 그녀를 보고 속 모르는 사람들은 관광객이라고 착각을 했을 터였다. 여관에 감금되어 있다가 그곳 사람들한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관을 몰래 빠져 나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광주에서 왔는디라. 80년도 5월에 전두환이가 내 자식을 죽여 부렀어라. 군인들이 총으로 쏴서 죽어부렀는디, 광주에 전두환이 내려온다고 우리가 행패 부린다고 나를 여기까징 데리고 왔단 말이요. 그놈들이 어디 사람이라요?” “당신 자식은 폭도야. 폭도 부모가 무슨 할 말이 있어? 총은 군인이나 경찰이나 들 수 있는 건데 왜 당신 아들이 들고 있느냐 말야. 그러니 잔말 말아.” 왜 어린 고등학생이 총을 들고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는 필요가 없었다. 그저 총을 들었으니 폭도일 뿐인 것이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지난 세월의 모멸감은 죽어도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어도 달라질 게 없었다... 재학이를 신묘역으로 이장하는 날, 아들의 뼈를 고르는 어머니의 손이 한없이 떨리고 가슴에 설움이 북받쳤다. 재학이 얼굴의 뼈는 코 아래쪽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재학이를 단 한번만이라도 보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어머니를 보고 환히 웃어주던 살아생전의 재학이 얼굴을 다시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져서 재학이를 부르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유골을 가슴에 품고 목놓아 울었다. 다시 돌아와 주지 않을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7-04-06 0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