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윤개원(尹開源) 묘역번호: 2-11 생 애: 1951.08.19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자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야학교사 유 족: 윤석동(부) -------------------------------------------------------------------------------------------------------------------------------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 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 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서울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애국시민들의 궐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가 하나로 단결하여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를 영원히 추방할 때까지 싸웁시다. 최후의 일각까지 단결하여 싸웁시다. 그러기 위해 5월 20일 정오부터 계속해서 광주 금남로로 총집결합시다! --------------------------------------------------------------------------------------------------------------------------------- 윤상원은 5월 19일 아침 무렵, 김상윤이 운영하는 사회과학서점인 계림동의 녹두서점에서 김상집과 함께 국민연합의 서울지역 관계자들과 만남을 갖고 서울 등 여타 지역에 광주의 상황을 연락했다. 오전부터 시위현장에 참여하고 공수부대 만행의 현장을 확인한 그는 시위투쟁의 조직적 홍보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오전 중에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은밀하게 전단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위의 선언문으로 이는 5월 26일까지 모두 9호가 제작 배포되었던 투사회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난한 이웃들 속에 함께 한 그에게도 어김없이 5월의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1979년 10월 유신의 우두머리 박정희가 암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민주화의 봄이 열렸다고 믿었다. 윤상원은 녹두서점에 출퇴근하면서 재야인사, 청년운동가와 빈번한 접촉을 하고, 서울의 이태복과의 만남을 지속하며 전국 단위 비공개 반합법 노농운동단체의 결성을 모색했다. 윤상원은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학생노동자연맹 두 조직에 가담하여 이태복과 돈독한 우정을 쌓아갔다. 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 햇불시위까지, 그는 전두환을 몰아내고 계엄령을 해제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농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석하고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지만, 결국 5월 17일 새벽을 기점으로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윤상원은 적극적으로 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대대적인 저항을 펼치면서 최후까지 싸워, 민주화가 이 땅에 뿌리박고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동지들과의 다짐도 그 시기에 있었다... 5월 26일 저녁, 공수부대가 다음날 아침 일찍 도심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때 도청에서는 300여 명의 시위대가 있었는데 윤상원은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여자들과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했다... 새벽 3시가 넘어 계엄군 공수부대 특공대가 도청 주변을 포진하고 1차 집중발포를 했다. 윤상원은 이양현, 김영철 등 다수의 시민군과 민원봉사실 2충에 있는 도청 회의실에 들어가 노동청 방면의 창틀에서 수비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살아오는 어머니의 얼굴,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면 다시 살아오는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 유난히 자신을 아껴주시던 할머니의 까칠한 손이 그대로 느껴졌다. 민중 속에서 살아가겠노라고 다부지게 들불야학을 시작하고서 젊은 날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한 후배 박기순의 모습까지, 윤상원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자신의 곁에서 총을 들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어린 동생들의 생명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들이 떠나고 나면, 정말로 이 땅의 민중들은 큰 숨 한 번 내쉬고 살 만한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비록 당장 내일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자신과 동지들이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양현, 김영철, 윤상원은 서로 손을 맞잡고 자신들의 최후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금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가 영원히 승리하기 위해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해야 한다...” 새벽 4시가 넘어 어슴푸레 날이 밝아올 무렵, 도청 뒷담을 넘어 공수특공대원들의 집중사격이 이어지고 윤상원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피를 흘리고 있는 그는 아직 가는 숨이 붙어있었다. 이양현과 김영철이 쓰러진 윤상원을 부둥켜안고 커튼에 싸서 옮기려는 순간 수류탄이 터졌고, 커튼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이렇게 윤상원은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가슴 뜨겁고 아픔 가득했던 열흘간의 광주항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을 꺽고,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꿈을 꾸기를 바랐던 많은 노동자의 꿈을 짓밟은 채 항쟁의 막은 내려졌다. 5월 27일 새벽에 도청의 비명 속에 살아남은 이들은 또 공수부대에게 끌려 나갔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7-03-09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