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란 게 참 흔하던 때가 있었다. 오래전에 봤던 별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있다. 은하수라는 단어의 뜻을 알기도 전에 봤던 무수의 별들. 요즘의 별들은 어떤가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작년 어쩌면 재작년 여름 지하철에서 기절했을 때 봤던 별들이 마지막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당장 죽어도 페이스북을 할 것 같은 표정 없는 사람들의 얼굴 마디 마디에서 반짝이던 것들. 도무지 삶이라 생각하기 싫은 섬찟하기만한 빛의 팽창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번쩍이지 않은 선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한다. 반짝이는 것들을 카메라로 찍을 때를 사랑한다. 살다 보면 별 것도 아닌 갈라진 가난과 결핍의 틈으로 떼지어 반짝이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 찰나의 위선들, 기만들, 사치, 술수, 간과. 너무 깊이 들여다보지만 않으면 별의별 반짝이는 것들로 눈이 멀지 않고도 내 그림자를 길게 늘려버리는 방법. 영원이 아니고서야 다 그만이다. 한여름 땡볕 아래 혈관 위로 땀들이 줄지어 반짝이는 것들은 나쁘지 않다. 여름은 습해서 좆같다는 것 외엔 아름다운 계절이다. 간석오거리 신호등에 서서 줄지어 내려오는 차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찬란이 꼭 별이어야만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아비의 굳은 손을 꽉 쥐고 걷는 저 꼬마의 집착이 찬란하다면 찬란이다. 내가 흉내내며 살고있는 찬란. 도대체가 억지스런 버릇. 습관을 고칠 수는 없다. 반복되는 습관만큼 한 인간을 정의해주는 틀도 없다. 나는 나라는 존재의 원본을 어쩌면 경북 고령군의 촌스런 강둑 위에서 낚시를 배우던 그날밤에 은하수를 보다가 잃어버렸다. 모니터와 전화기와 간석동에서 부천에서 남동에서 역곡 동명 홍대 봉천 사당 동국대입구 충무로 태전 또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어딘가로부터 어딘가까지 자꾸만 증식을 반복하며 업을 복제하는 오거리에 숨은 명물 죄송의 시뮬라크르 밑줄 쫙-
골드문드의 음악을 듣고있으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멀리 두게 된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지극히 단조로운 구성들만으로 이런 감정들을 끌어낼 수 있는 건지. 당분간 비는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가로수 위로 올라탄 건물의 꼭대기로 보이는 초대형 어머니가 사시는 곳은 계약금 10%면 즉시 입주가 가능하다. 닿을 수 없는 것들, 너무 먼 곳만 보다 허망할만큼 피곤함에 묻힐 때 내가 너무 멀리 보고있구나 깨닫고는 침울해진다. 가시지 않는 자괴감으로 많은 피로감, 그만큼 많은 것들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 한다. 오늘 아침까지 무슨 꿈을 꿨었지. 밤새 꿈으로 지새웠지만 기억나지 않는 것들, 여러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살아있다면 살아있으니 계속 될 것들이다. 무슨 꿈이었을까, 허망했겠지. 뒤범벅. 아무리 무언가 어떻게 뒤척여봐도 이미 나는 유실된 나이고 변함은 없다. 애초에 무엇을 바랬건 밝음 없는 거품들 반짝이며 출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