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나는 니가 귀신인 줄 알았어.
귀신들이 나오는 꿈에서 귀신들이 나오는 학교였으니까.
막 도망을 나오는데, 사람치고는 니가 너무 하얳던 게 문제야.
비가 참 많이도 내렸다.
그 길로 우리는 같이 쿠데타에 합류했고
진압 대열을 밀쳐대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
순간 니가 내 등에 손을 얹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진압 대열의 와해 목적으로
어디까지나 그냥 서로를 앞으로 밀어낸 거였지만.
뭐 어찌 됐든, 그때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다짐했어.
동시에 나의 할머니를 잃어버렸어.
아무 때나 사랑을 하고 아무 때나 이별을 했어.
연막탄이 터지고 여기저기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가는데,
핸드폰 알람은 울렸고 나는 결국 둘 다 두고 올 수밖에 없었어.
키우려던 도마뱀을 취소했다.
이름까지 미리 정해뒀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없었던 거지.
나는 내가 작은 선인장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 해서
그만 죽여버리고 말았다는 걸 미처 잊고 있었어.
조금 들떠있었고.
선금으로 걸어두었던 오만 원은 돌려받았다.
돈 굳은 셈이라고 치자.
턱수염이 인상적인 가게 사장님에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몇 번이고 사과하는데
흉하고 볼품없는 저 플라스틱 서랍 속의 나나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행여나 실망했을까,
그렇게 자꾸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
조금 부끄러웠고.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도 모르면서
그러게 이름은 왜 벌써부터 정해놔서.
미처 잊고 사느라,
며칠 들떠사느라.
같은 기억을 반복하기 싫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죽는 선인장이 돼버릴까 봐.
이름을 지우고, 꼬리를 잘라버렸어.
집으로 돌아와 심심하여 책을 보는 흉내를 냈다.
가끔 집에 멍하니 있다 보면,
이런 나를 누가 볼까 봐 괜히 부끄러울 때가 있잖아.
벽에는, 구석에는, 책상 모서리에는, 스피커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 하는 눈들이 숨어 사는지도 몰라.
아니면 천장을 꿰뚫고 저 하늘에서 조상들이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 녀석, 너 또 자위하니?" 하면서 말이야.
그러면 나는 "후손들이 왜 자위를 하는지 알아요..?
외로워서, 외로워서 그래요."라고
여고생 같은 대답을 해야지. 은교야, 고마워.
하지만 그들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잘 알 거야.
나는 무신론자로 뻔뻔하게 사느라 그랬다고 나중에 둘러대지 뭐.
대대손손 이런 식이야.
아무튼, 촌스럽고 철 지난 지브라 이불 위에서 책을 뒤척이는데
또 다른 책이 침대 밑으로 떨어지면서
검은색 인스타 프로틴 통 옆으로 툭 파묻혔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나는 사실 줄곧 나만 보고 있거든.
나는 나밖에 몰라.
결과적으로는 그래.
아무렇게나 사랑했고 아무렇게나 이별했고.
억지로 턱걸이를 하고 땀을 씻는데, 잘랐던 꼬리가 어느새 또 자란다.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당분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