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속에서 깃발을 꽂을 수만 있다면,
남은 계절을 설렘도 없이 살라 하면 그리 살겠다.
백열등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남은 시간을 웃음도 없이 살라 하면 그리하겠다.
박지 못해 안달 난 개들 사이에서 이빨을 드러내는 것도
떼지 못해 안달 난 고양이들 사이에서 젖병을 던지는 것도
잡담으로 시작해서 농담으로 관계의 끝을 맺는
도무지 뒷모습 없는 이 가벼움의 국경에서는
모두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흥미거리.
그러나 내가 세계를 이해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
나의 목소리로 나를 괴롭게 할 뿐이었다.
새벽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열망으로 무릎이 자라는 꿈을 꾸며
비명처럼 빛나던 소년은
죽어가는 늙은이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나가! 나가 없어진들 달라질 건 없으니까.
이 삐뚤어진 루저새끼!"
더럽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흉부의 소란은 끝을 모른다.
기만은 습관이 되었고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결빙의 순간들.
그러므로 나는 시계 위에서 더듬거렸다.
이곳에 있으면서 언제나 이곳에 없는 사람처럼
이곳에 뿌리를 박았으면서
이곳을 기억 밖으로 내쫓으려는 사람처럼
나의 발자국 소리가 나를 놀라게 할 때마다
접시 위의 계란이 떨리듯 저려오는 새벽을 생각했다.
오늘 내가 길 위에서 주워다 쓴 살얼음의 시간들.
이번엔 어떤 상징적인 얘기가 아니다.
어깨너머로 그리는 앙상하고 적나라한 누드크로키.
위로도, 동정도, 조언도
문 밖의 썩은 나무가 되는 계절
나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주저앉는다.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이것도 하나의 장르라면
나의 알몸을 누구에게 적어 보여야 하나
울먹이며 서성이는데 바람이 온 몸을 때린다.
바람을 말리는 바람은 없다.
어디로 가야 하나
비를 피해 얼굴을 피해
여러 갈래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싶었다.
모든 친숙한 것들이 거리 위로 하찮게 나뒹군다.
소음이며 얼굴들과 향기, 목소리와 촉감, 안부,
언젠가부터 이해할 수 있게 된 이 거리의 주조음들까지.
잘 있거라 말하고 싶었다.
잘 가겠다 말하고 싶었다.
이토록 비좁은 육신의 표피 위로
어찌 꿈들은 틈을 찾았었는가.
그러나 가여운 건 시간이지,
내 육신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투신하는 또 하나의 흔한 이름으로서
아무런 소식 없이, 풍문 없이 낡은 길의 끝에서
두 주먹의 잿가루가 되었으면 했다.
한 줌 안녕, 하루치의 따뜻
한 줌 안녕, 하루만큼의 봄
이제 세상의 축제로 편안히 속하기를.
'바람, 닫힌다. 창문도 밤도 낮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