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하루종일 비가내린다. 나는 늦은 귀가를 하고 빨래를 돌린다. 드럼 세탁기가 도란도란 돌아가다 가끔씩 끼익끼익 소리를 낸다. 혼자 있을 때엔 세탁기의 도란거리는 소리와도 대화를 한 적 있다. 지금의 나는 모든 사물과 대화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나의 말을 가장 잘 들어주고, 반응해줄 이 있기에 굳이 혼잣말을 하지 않아도 되므로 사물들과의 대화는 나중으로 미뤄둔다. 모든 시작이 새롭다. 장마가 시작된 며칠 전, 그가 말한다. 비 때문에 라고. 모든 건 비때문이에요. 나는 그를 천천히 돌아보며, 저 말은 내가 늘 하던 말이고 나는 모든 이유를 비 때문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모든 이유가 비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살며시 웃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그건 비 때문이지요. 나는 그의 말을 들을 때 마가 내가 그동안 자주 해 오던 말과,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린다. 내가 말하고 있지 않아도 그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로 말을 한다. 그의 입을 빌려 내 마음을 말하는 것과도 같다. 어떤 날에는 내 입을 빌려 그의 마음을 말하기도 하는지 내 말에 언뜻언뜻 놀라는 그를 발견하기도 한다. - 주말 내내 비가 올거래요. - 비를 보러 가는거에요, 비를 맞으러. - 멋져. 그의 비가 많이 오면 힘들어 할 것 같은 마음에 조금 걱정하였는지, 내가 비를 맞으러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하자 다시 웃으며 멋지다고 말하며 나를 안아준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좋다고 반응해주는 그가 너무 좋아서 한번 더 안아줬다. 비가 내리던 어제 저녁, 우린 그의 친구들이 있는 주안으로 갔다. 송내역에서 인천방면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내려가는데 인천방면 급행이 지금 막 도착해 있었다.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고 몇몇이 올라탔다. 나는 급행 열차에 탈 수 있을것 같아서 그의 손을 잡고 계단을 재빨리 내려왔다. 아직 덜 내린 사람들이 열린 문 틈으로 쏟아져 나왔고 이제 탈 사람들이 탈 차례, 하지만 문이 벌써 닫혀 버리면 안되는데, 내가 열차 안으로 몸을 밀어내는 순간 문이 닫혔고 그와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위험해, 라는 말이 들렸고 순간 나는 뒤로 후진해야하는데 후진이 되지 않았고, 앞으로 가려는 반동에 의해 열차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그는 문 밖에 서 있게 되었다. 문이 닫히고 출발하기 전, 몇 초의 시간 동안 그는 주안에서 만나 라고 말했고 나는 유리문 사이로 '내 가방이 당신에게 있기 때문에 난 휴대폰이 없다. 그러니 다음 역에서 만나기로 하자.' 라는 말이 내포 되어 있는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하고 없다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키며 다음역, 다음역. 이라고 말했다. 물론 서로의 입모양만으로 알아들었을. 문이 닫히고 급행 열차는 출발했고, 열차 안의 사람들이 혼자 덩그러니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바라봤다. 몇몇은 웃기도 했고 몇몇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기도 했다. 급행의 다음 역은 2개역을 지난 부평역이었다. 나는 내가 올라탄 8-4 플랫홈에 서 있었다. 내린 후, 그를 기다리는데 오만가지 생각들이 다 들었다. 내겐 지금 지갑만 딸랑 들려있는 상황이고, 만약 그가 이번 역이 아닌 주안역까지 가게 된다면, 내가 휴대폰 없이 그를 주안역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 아니면 내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오진 않을까 하는 것. 그러나, 나는 다음 열차를 타고 8-4번에서 나를 보고 내리거나, 내가 그가 타있는 열차를 타거나 할 수도 있을거란 생각도 했다. 10분 동안의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어떻게도 연락할 수 없는 상황. 어제는(6/23) 그가 사무실에 휴대폰을 두고 퇴근을 하는 바람에 집 앞으로 온다는 그를 기다리며,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었는데. 이번엔 내가 문이 닫힐 위기에 있던 급행 열차에 올라타는 바람에, 내 가방을 들고 있던 그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딸랑 지갑하나 들고 있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부평역 8-4번 앞의 풍경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내 가방이 그에게 들려있었으므로. 드디어, 인천행 일반 열차가 송내역을 떠나, 부개역을 지나 부평에 도착한다고 전광판에 뜬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열차가 오는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8-4번 즈음에 열차가 멈출 때, 그의 얼굴이 안 보이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다. 열차가 완전히 멈추고 8-4의 문이 열리고 그가 나를 보며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게 손을 뻗었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너무 슬펐어. 그가 말한다. 나도 너무 슬펐어, 라고 말한다. 하지만 슬프고도 웃겨서 마구 웃었다. - 우리 너무 어이없어. - 하지만 좋아, 못 보는 줄 알았네. - 우리 너무 바보같아. - 그래도 좋아. - 열차가 가니까 어떤 아저씨가 옆에서 간다, 간다 여자친구가 간다. 여자친구를 버리다니. 라고 말했어. - 정말? 지켜보고 있었던거야, 그 아저씨. - 응. - 난 문 닫히고 출발하니까, 사람들이 다 날 쳐다봤어. 잠깐 뒤 돌았다가 다시 문만 쳐다보고 있었어. - 히히 - 히히히 내가 회사에 우산을 두고 갔던 날, 그는 - 내가 우산 두개 가지고 집 앞으로 갈게. 그럼 돼. 우산이 딱 하나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다른 우산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겐 얼룩말 우산 그것 하나 뿐인양, 그의 말을 들으며 세상에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이 사람이 바로 내 사람이라니 감동하고 있었다. 물론 집 앞까지 온다는 말에 응, 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돼 라고 말했지만.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했더니, 그는 내일 아침 8시 30분까지 집 앞으로 나와 라고 말한다. 나는 안돼, 그냥 출근 해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올 것을 알고 있으므로 회사에 휴대폰을 두고 온 그의 손바닥에 내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이튿날 아침, 송내역 공중전화로 전화를 해 온 그는 40분까지 도착한다고 말했고, 나는 35분에 나와 40분에 집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얼룩말 우산을 쓰고, 그가 어느 방향으로 올지몰라 두리번 거리며. 41분 42분. 시간이 흐를 때 마다 내게 오는 것인지, 바로 출근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지각하지 않을 시간까지 있다가 가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온다고 했으니 정말 올 것을 알고 있으므로 조금 늦는다 해도 기다릴 생각이었다. 육교 쪽에서 오나, 정류장 쪽에서 오나 모르겠어서 몇 발자국 왔다갔다 하다 46분에 내 뒤에서 그의 기척이 들렸다. 보라색 우산을 들고 오는 그는 하나도 젖지 않았다. 송내역에서 택시를 타고 왔다고 한다. 보라색 우산을 접고, 내 얼룩말 우산을 같이 쓰고 육교를 건넜다. 그와 함께 하는 아침산책, 나와 비를 맞으며 아침산책을 할 사람이 내 옆에 있다. 이렇게, 하루종일 비가 내린 오늘, 우린 저녁을 먹고 가볍게 차를 마시고 그는 여전히 집 앞까지 나를 바래다 준다. 얼룩말 우산 하나를 펼치고, 내 쪽으로만 기울인 채. - 근데, 비 많이 오는데 그냥 가지, 힘들게 데려다 주고. - 여기까기 오기가 힘들었지. - 응? 나 혼자 오면 더 힘들다고? - 아니, 여기 까지 오기가 힘들었다고. - 그러니까, 나 혼자 오면...아, - 응. 그동안 얼마나 보고싶고, 손 잡고 싶고 안아주고 싶었는데. - 응, 그동안! - 응, 몇 달 동안. - 히히 - 히히 아, 너무 좋아. 어디갔다 이제 왔어! {라고 말하면, 그는 어디갔다 이제 왔냐는 말이 그렇게 좋다며 또 마구 웃는다. 히히히히 하고.} w_20110625 p_20110627 장마를 피해 떠난,
진소흔
2014-02-25 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