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범죄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고백과 용서가 이뤄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용서가 공인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남아공에서는 그것 이 이뤄졌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비쇼 대학살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을 때다. 비쇼 대학살은 1992년 9월 남아공 이스턴케이프주 의 비쇼라는 도시에서 ANC가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행진을 벌인 날 이곳의 시스케이 방위군이 발포해 28명이 현장에서 사망한 사건이다. 부상자 중에서도 30명이 사망했다. 비쇼 대학살 청문 회는 학살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열렸다. 방청석은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이들과 희 생자의 가족, 부상자들이 앉아 있었다. 청문회장은 증언이 시작되기 전부터 긴장이 팽배해 있었 다. 첫 증인은 당시 방위군 사령관이었던 마리우스 울스히흐였다. 위원회의 요구로 소환돼 나온 울스 히흐는 시종일관 냉소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청중은 그의 증언 내용보다 그의 말투에 더 분개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험악해지고, 청문회장의 긴장감은 분노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두 번째 증인은 당시 방위군 장교 4명이었다. 1명은 백인, 3명은 흑인이었다. 백인 장교 호르스트 스 호베스버거 대령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병사들에게 발포를 명령했습니다." 그의 태도와 말투는 감정을 자제하고 절도를 지킬 것을 강조하는 군인 정신이 배어나온 것이었지 만, 그들로 인해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자신들도 평생의 상처를 입은 청중은 그렇게 받아들이 기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청중이 증언석으로 뛰쳐나와 주먹을 날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스호베스버거는 몸을 뒤로 돌려 청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긴장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 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좀 더 낮고 정중한 톤이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비쇼 학살 사건은 우리가 남은 생애 동안 늘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할 짐입 니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3명의 다른 흑인 장교를 가리키며 청중에게 부탁을 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긴 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이들은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증인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동료였던 이들을 여러분의 공동체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이들이 당시 겪 었던 엄청난 부담을 헤어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순간, 방청석에서 터져 나온 것은 박수와 함성이었다. 오-오! 우레와 같은 소리는 감탄과 경의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박수는 갈채가 되어 청문회장을 가득 울 렸다.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니었고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백인 장교의 진심 어린 사과와 당부에, 청중이 순간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투투는 침묵 속에 박수와 환호가 가라 앉기를 기다렸다. 함성이 잦아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집시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의미심장한 장면 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모두 아실 겁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고, 용서하는 일도 쉽지 않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 받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김지방 <적과 함께 사는 법>
那由他
2014-02-17 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