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st dream
4.3 민주올레
제주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
동백동산(선흘곶자왈)은
평지에 이루어진 곶자왈 이어서
연못과 동굴이 발달되었다
그래서 4.3시 선흘리 주민들이 많이 피난처 구실을 했으나
대부분 토벌대에 발각되어 많은 희생이 이루어졌다
선흘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4.3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고대의 성이 아니라
토벌대들이 선흘리를 소개하고 마을 주민들을 집단 거주케하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해 싸아올린 성이다
4.3 최대의 피해지역중 한곳인 북촌은
초등학교에 모인 수백의 주민을
학교 주변으로 데려가 집단학살을 자행한 곳이며
너븐숭이, 애기무덤은 그곳중 한곳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주4.3의 배경
제주 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체제 하의 한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제대로 보려면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나뉜 냉전 상황과 제주도의 정치·경제·사회적
여건, 그리고 저항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잠시 4·3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는 차원에서 광복 직전의 제주 상황을 살펴보자!
제주도는 1920년대부터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가 개설되었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에서의 힘든 삶 속에서 상당한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는 대학 교육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광복 직후 건국 준비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마을마다 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당시 제주인민위원회는 제주 특유의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중앙과는 다르게 좌우대립 없이 온건하게 일을
추진해나갔고, 항일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원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47년 3·1절 발포사건 이전까지는 미군정과의 협조도 잘 되고 있었다.
그러나 6만에 이르는 귀환자에 따른 실업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로 인한 300여 명의 희생, 대흉년과
양곡 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미군정 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 관리들의 부패 등으로
광복으로 인한 기대감은 곧 무너졌고, 미군정에 대한 불만도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다.
3.1 발포 사건과 민관합동 총파업
이런 분위기 속에 47년 3월 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 독립 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시위 후 구경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군정 당국은 좌익의 선동으로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발포였다고 했지만
사망자가 초등학생, 아이를 안은 부인, 농부 등 시위를 구경하던 군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도민들을
격분시켰다.
하지만 군정 당국은 발포를 정당방위라 주장하면서 민심 수습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월 10일, 분노한 도민들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하며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민관합동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 파업에는 도청을 비롯한 도내 156개 관공서,
국영 기업들도 참여하였다. 도내 전체 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동참해 문을 닫았다.
심지어 경찰관들마저도 파업에 동참하였으며 도지사 박경훈도 항의성 사표를 제출했다. 여기에 지방 신문도
희생자 조의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며 파업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등 도민 전체가 미군정의 실정에 분노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팀이 "총파업에는 경찰 발포 사건에 항의하여, 좌우익 세력이 공히 참가하고 있다"라고 보고할 정도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 대령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은
제주 총파업의 원인을 3·1절 경찰 발포로 인한 도민 감정의 격화와 이런 도민 감정을 선동하여 증폭시킨
남로당에 있다고 파악했다. 그러면서도 '경찰의 발포'는 애써 무시한 채 '남로당의 선동' 에만 치중하여
강경책을 추진해 갔다. 미군 조사단이 제주를 떠난 다음날 경무부장 조병옥과 경찰대가 제주에 들어오고
타 지역 출신 수사 요원들을 중심으로 한 특별 수사대가 구성되었다.
이 무렵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며 3월 15일에는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본토에서 온 경찰과 서북청년회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 고문했고 심지어
금품을 갈취하기 위하여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내는 등 백색 테러를 계속하였다.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고 4·3 직전까지 2,500명이 구금되었다. 48년 3월, 조천 지서와 모슬포 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여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와 같은 제주의 상황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한반도 정세와 맞물리면서 더욱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
양심적인 우파 및 중도파들조차 단독 선거 반대 운동에 나서자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제주도민 사이에도
조성되어 있었다. 제주의 남로당은 이런 민심에 부응하여,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4.3의 시작
48년 4월 3일 새벽 1시 경, 김달삼을 중심으로 조직된 500여 명의 무장대가 11개의 지서와 우익 요인의 집을
습격하면서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깃발을 내걸고, '단선·단정 반대',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대해 미군정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 경찰 1,700명을 제주에
파견하고 서북청년단을 증파하여 대응했다. 경찰과 서청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고 도민들이 산으로 피신하자
자연히 무장대 세력은 더욱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한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 등 극우파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先선무 後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협상 직후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의 조작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과 5월 3일
기습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 협상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5월 5일, 군정장관 딘(W.F.Dean) 소장은 제주에 와서 최고 수뇌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평화적 해결안을
건의하다 경무부장 조병옥과 충돌한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했다. 이로써 평화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5월6일,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이 부임했고 11연대가 제주에 추가 파견되었다.
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주는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됨으로써 제주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단독선거 거부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단독선거를 추진해 온 미군정은 제주도를 눈의 가시로 여겨 군병력과 경찰력을 더욱 강화했다.
증강된 군을 총괄하기 위하여 5월 중순 브라운 대령(미군 20연대)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경비대,
해안 경비대, 경찰과 미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브라운은 원인 치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진압 일변도로 몰고
나갔고, 신임 박진경 연대장도 토벌 위주의 작전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폭도 아닌 폭도를
잡아들이는 부작용을 일으켜 도민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48년 5월 20일에는 연대장의 토벌정책에 반기를 든 41명의 대원들이 모슬포 연대 본부에서 무기와 장비,
탄약을 가지고 탈영, 산 쪽에 가담하여 무장대의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럼에도 딘 장군은
박 연대장의 강경책을 오히려 칭찬, 6월초에 직접 내려와 대령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하지만 박진경의
강경 토벌은 반발을 일으켜 6월 18일 부하 문상길 등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 토벌대에 충격을 주었다.
초토화 작전과 대학살
무장대 측은 지하선거와 해주대회 참여에 주력하였고, 이승만 세력은 남한정부 수립에 몰두하였기에 사태는
48년 8월까지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8월과 9월, 남과 북에 적대적인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주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넘어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정부를 장악한 이승만 정권은 평북 출신의 극우파를 제주경찰국장에 임명하고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본토의 병력을 대거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신임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에서 5㎞이상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규정,
이 지역에서 보이는 자는 폭도로 간주 무조건 사살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로서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적성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어 10월 18일에는 해군 함정 7척을 동원하여 다른 지방과의 뱃길을 차단하고 제주의 모든 배에 출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제주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병 예정이던 여수14연대가 토벌을 거부하며 총부리를 돌려 이른바
'10·19 여순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미 계획된 제주 초토화 작전에 기름을 부었고 결국 참혹한 양민 학살로 이어졌다.
초토화 작전을 위하여 토벌대는 10월 하순 제주읍내 유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 수용소에 대부분의 유지들이 소환되면서 읍내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법원장이 연행되었고 현직 검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 그리고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현경호),
제주신보 편집국장(김호진)이 사살되었고, 도청 총무국장이 서청에 의해 고문치사 당했다.
서청은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했다. 11월 초순에는 9연대 장병들 중 제주 출신자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다. 11월 17일에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작전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48년 10월말부터 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4·3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3만 정도로 추정되지만
초토화 작전전인 48년 9월말까지의 희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에 ‘불과’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으로 강제 소개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다. 소개령이 내려져도 노약자를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들에 대해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이 이루어진 곳도 많았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소위 '삼진정책(三盡政策)'은 온 제주를 피로 물들였다.
부족하나마 조사된 제주도 의회 신고 자료에 따르면 마을별 희생자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봉개리 599명,
아라리 581명, 노형리 581명, 가시리 506명, 북촌리 487명, 삼양리 443명.... 이처럼 마을 별 희생자는 끝이 없다.
초토화 작전으로 무장대는 빠르게 약화되었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무장대와 토벌대가 두려운 주민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무장대에 의한 학살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주도권을 잡은 정부는 49년 3월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 마무리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토벌대가 5만여 명의 도민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대거 동원, 산을 빗질하듯 쓸어내리자 무장대는 거의 궤멸되었다. 49년 4월 9일 이승만이 제주를
방문하여 5월 10일에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5월 중순에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어 1개 대대만이
진압에 나서도 될 정도였다. 6월초,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저항은 거의 소멸되었고, 생존자들은
토벌대의 눈치를 보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자 학살은 다시 시작되었다.
육지에 수감된 이들은 인민군이 오기 전에 대부분 처형되었고(50년 7월) 훈방되었던 사람들도 예비검속으로
학살되었다(50년 7월∼9월). 이들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군경에 비협조적이다', '총파업에 가담하였다',
'4·3 때 가족이 죽었다' 등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으로 죽어갔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은 약 1천명이다(경찰서 별로 제주시 400∼500명,
서귀포 250명, 모슬포 250명, 성산포 6명). 모슬포의 백조일손묘에 묻힌 사람들도 이때 죽은 이들이다.
4.3. 비극의 마무리
집단 학살로 신음하던 제주는 54년 9월 21일, 입산금지령이 해제되고 주민들의 마을 성곽 보초 임무가
폐지됨으로써 6년 6개월 만에 외면상 평시 체제로 돌아왔다.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은 송당 지역에서 57년에 생포되었다.
3만여 명의 무고한 양민이 죽어간 제주 4·3은 단순히 지역사로 여길 수 없는 대사건으로, 냉전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이다.
친미 반공 국가를 세우려 했던 미국과 미국에 기대어 정권의 안정을 확보하려고 했던 이승만 세력에 의해 제주는
냉전의 희생양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토벌대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이(제주도의회의 자료에 의하면 83% 이상이
토벌대, 11%가 무장대에 의한 희생) 이를 말해 주고 있다.
2010 민주올레운영위원회
http://cafe.daum.net/minjuwalking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http://www.knowhow.or.kr/main/main.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