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얘기를 하자면, 특이하게도 중국집에서 사색을 하는 스타일이다. 뭔가 일이 안 풀리거나 고민해야
할 일이 있으면,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놓고 그걸 기다린다.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그 짧
은 순간, 모든 감각이 오직 짜장면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로 변해 복잡한 머릿속은 정돈이 되고, 생각이
라는 이름의 모호한 안개가 걷힌다. 그리고 짜장면을 먹으면서 먹는 일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반
대로 얼마나 쓸쓸하고 한심한 일인지도) 깨닫게 된다. 그런 깨우침은 복잡해진 인생사를 단순하게 만
드는 마력이 있다. (…)
중국집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울을 떨쳐내기 위함이다. 찬거리를 장만하는 오
후의 시장이나, 새벽의 수산시장에 가보시라. 악다구니 같은 삶의 전쟁터를 보면서 '다들 저렇게 살려
고 애쓰는데' 하는 경외감과 부러움이 샘솟게 된다. 나의 우울이 얼마나 가당찮고 에고적인지 뼈저리
게 된다. 그런 목적으로 중국집에 가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한두 시가 좋겠다. 외근 나온 영업사원이나 환경미화원이나 막노동자 같
은,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시간에 중국집에 깃든다. 건강한 육체 노동자들의 왕성한
식사 현장을 훔쳐보는 것이다. 대개 그들은 곱빼기를 시킨다. 속으로 조용히 읽어보시라. 곱빼기. 이
말에 복 있으라. 짜장면을 양껏 젓가락으로 말아 올려, 입가에 소스를 묻히며 후루룩 소리도 요란하게
한 다발의 짜장면을 넘기는 장면… 나는 거기서 생명의 힘을 느낀다. 우리가 뭘 먹는다는 행위는 진정
숭고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햄버거를 그렇게 먹는다고 할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어서,
중국집이란 더욱 소중해진다. 더구나 시내에선 비싼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뒷골목의 지하나 이층으
로 숨어드는 지경에 빠진 중국집의 현실이 더욱 가파른 감정 상승을 돕곤 한다. 이러다가 아예 중국집
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 따위 말이다.
짜장 곱빼기는 우리에게 투박한 민중의 식욕을 드러낸다. 스테이크나 푸아그라에는 진정한 곱빼기 개
념이 없다. 한국 음식에서도 냉면을 예로 들면, 사리를 하나 추가하면 냉면 값의 절반이 넘는다. 구천
원짜리 시내 냉면집의 사리가 육천 원이다. 그러나 짜장면만은 오직 오백 원만 더 받을 뿐이다. 양은
한 배 반 정도로 듬뿍 더 얹어주고 값은 '조금'만 더 받는 것이다. 중국집의 흥망성쇠와 영욕의 역사에
서 수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 곱빼기의 인정은 여전하다. (감사합니다!)
그 짜장면이 슬플 때도 있다. 비 오는 날 저녁 어스름에, 주택가 골목이나 추레한 상가의 복도에서 만
나는 다 먹은 짜장면 그릇이다. 음식의 존엄은 사라지고, 칼로리만 존재하는 슬픈 풍경이다. 신문지라
도 살포시 덮여 있으면 좀 나을까.
- 박찬일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