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기일, 2010
[중략]
책장의 책들이 가끔씩 자리 이동을 한다. 스스로가, 첫번째 줄의 3번째 칸에 있다가 다섯번 째 줄 두번째 칸으로 이동했다. 한참 동안 그 책을 찾는데 도대체 보이지 않아서 포기를 하고 다시 구입해야 하나, 아니면 누굴 빌려 준 것일까, 혹은 아예 줘 버린 것일까 생각하고 다른 책으로 마음을 돌리려는 순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가 옆에 떡하니 꽂혀 있지 않은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그렇지 않은 작가들을 따로 구분 지어 놓곤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칸에는 그들만의 책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책이 왜 그렇지 않은 책 옆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을까. 나는 그동안 내가 어떤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는지를 떠올린다. 떠올려 봤으나 새로 산 책 뿐이고 이미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손을 댄 적도 없었다. 그 외에도 밤 중에 잠들기 위해 항상 켜 두는 주방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바로 앞에 스무 칸의 책장이 빙글빙글 돌며 각 칸마다 위치를 바꾸는 것 같은 환영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환영인지, 아니면 실제 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책장 앞에 세워져 있는 기타 소리를 상상하며 잠들곤 한다. 저 기타도 연습해야 하는데, 하며. 무의식의 경계. 나는 깨어 있는 것일까, 잠들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창 밖엔 비가 내리고 있는 가, 아니면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가을 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대어 낙엽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가을 밤. 그리고 그와 벤치에 앉아 음력 11일 달을 올려다 보는 가을 밤. 달무리가 진하게 드리워져있다. 달의 형체는 뭉그러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고. 가을 밤,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밤. 전생에 알았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지나며,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서로 눈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그 부름에 가끔 응답을 하기도 하는데, 요즘은 아무런 대꾸도 하고 싶지 않다. 나를 전생에 알았던 그들은 현생의 나를 잘 못알아보고 다른 이름을 부르기도 하더라. 그리고 나는 오랜 시간을 거쳐 당신을 만나러 배꽃나무 아래로 향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아름다운 시절로 부활하는 것은 언제나 '먼 훗날'이다.
현재 시제에서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과거 시제에서 추억을 발명함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자위한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언제나 과거라는 사실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이 있다.
p. 121 입에서 터지는 탄산의 죄책감_화양연화
다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해도,
비참한 생활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일만큼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덜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나는 정말 이들보다 더 행복한가.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물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똔레삽에서 현자처럼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위선일까.
보트를 돌려 돌아오는 길에 해가 뉘엿뉘엿 졌다.
이 흙빛 삶의 터전에 비치는 태양도
다른 어느 곳의 태양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 속에는
기묘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이 여행은 이제 내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p.131 입에서 터지는 탄산의 죄책감_화양연화
<필름 속을 걷다>_글/사진 이동진
텍스트_입에서 터지는 탄산의 죄책감 中,
http://blog.naver.com/4yorae/30122925008_2011_1107
이미지_관계의 기일,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