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 때부터 벽을 찍기 시작했다.
집을 찍었고 문을 찍었다.
그 때는 내가 왜 그것들을 찍는지 알지 못했다 - 지금도 온전히 이유를 알고 있다고는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래된 것들에 대한 경외감이었고,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이고 그리움이었다.
세월이 지난 벽은 이끼를 품는다. 벽에는 얼룩이 생기고 적당히 금이 간다.
반짝거리던 쇠문에는 녹이 자리잡는다.
인공구조물이 나이를 먹으며 특별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오래된 것들을 찾다보니 자연히 어릴 때 살던 산동네와 비슷한 곳들을 다니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산동네는 곧 재개발 지역, 또는 철거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웅장한 도시는 산동네를 포용하지 못한다. 그 땅 안에 작은 텃밭을 용납하지 못한다.
빨래를 널 수 있는 작은 옥상을 용납하지 못하고, 강아지를 키울 수 있는 작은 마당을 용납하지 못한다.
공간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그런 곳들은 철거 되어야만 하고 곧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나는 산동네의 정취를 사랑한다.
대문 밖을 지나면 훤히 들리는 술취한 아저씨와 아줌마가 크게 나누는 시시한 대화가 즐겁고
지나가다 맡게 되면 빨랫대에서 나는 향긋한 세제향이 좋다.
그러나 나의 생활이 아니라는 안도감에 추억으로 미화 시켜버리기에는
이 땅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서로의 이익다툼으로 재개발의 이권을 더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걸어둔 현수막이 걸려있고
내가 눈인사를 가볍게 건내며 휘파람을 불어 친해지려 하는 고양이를 보고
발을 험하게 구르며 쫓아 버리는 아저씨가 있었다.
내가 화면을 만들어 사진을 찍으려 하던 프레임 안으로
90도로 허리를 꺾고 힘겹게 폐지를 모은 수레를 끌며 지나가는 할머니가 있었다.
산동네에 살던 우리 할머니가 떠올랐고, 힘들게 살아오신 부모님이 떠올랐고
왠지 모르게 나의 모습도 떠올랐다.
왜 힘든 그들의 모습에서 인생 자체가 느껴졌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 수많은 문을 찍게된 것은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사진을 찍었고 또 X자가 보이는 문을 찍었다.
그러다 보니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 생각났다.
도둑들이 알리바바를 죽이기 위해 그의 집에 X 표시를 해두었지만 알리바바는 기지를 발휘하여
마을의 모든 문에 X표시를 해 도둑들이 그를 찾지 못하게 했다.
알리바바의 목숨을 살린 똑같은 X표시들은 철거촌의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죽이는 표식이 되었다.
무엇을 먹고,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쏙 빼둔 채
문에는 X표시만 남아있다.
문들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만큼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져 있고
그 앞에는 풀이 자란다.
모두가 떠나 굳게 닫혀 있는 X표시가 있는 대문 앞에는
끈질긴 생명력의 풀들이 끝까지 남아 장식을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