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뼈
승려 혜통의 본래 이름은 알 수 없다.
속세에 살 때 집이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있었다 한다.
하루는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그 살은 발라 먹고 뼈는 뒷동산에 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와서 보니 뼈가 사라지고 없어 핏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뼈는 전에 살던 동굴로 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이 모습을 보고 놀랍고도 기이하게 여겨 한참 탄식하고는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해 이름을 바꿨다.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유사의 내용을 어찌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으랴.
하지만 사실을 넘어선 진실이 이 이야기 속에 있지 않나?
당신이 어머니께 받은 오롯한 자애를 떠올려 보라.
그러면 죽은 수달의 이야기를 허황한 미신이라 돌려놓지는 못하리라.
동물과 사람을 막론하고 어미가 베푸는 순전한 사랑은
'없이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표상이다.
과학과 합리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회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어미의 가없는 사랑, 바로 그 속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더냐.
세상의 온갖 냉대와 괄시에 굴하지 않고 예수를 온전한 인격의 사람으로
키워낸 마리아는 분명 성모라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어머니의 자리는 자신이 키워낸 아들의 인격에 비례하는 법이다.
마리아가 그러하고 사임당이 그러하고 또 어거스틴의 모니카가 그렇지 아니한가.
여자에서 아내로 아내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자모(慈母)로 자모에서 성모(聖母)로.
인간으로 태어나 향상일로(向上一路)하지 않고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겠는가.
하지만 탐진치(貪瞋痴)에 물든 패역의 시대는 하느님을 닮은 어미의 덕성마저 앗아가고 있는 듯싶다.
병든 남편을 버리고 어린 자식을 외면하는 넋나간 어미들이 우리의 삶터에 넘쳐난다.
어머니라는 고난의 면류관을 주저없이 내팽개치는 순간
어미와 아이의 인생은 밑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어미가 어미다움을 잃은 혹은 포기한 세상이 바로 지옥이 아닌가.
천국과 지옥은 언제나 삶 저 너머가 아닌 일상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어미의 자리는 본디 간난과 신고의 자리다.
간난의 불을 견디고 신고의 망치질을 온전히 감내한 뒤에라야 어미는 진짜 어미가 된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어미들이여. 부디 '살 맛'에 집착하지 말라.
살(肉) 맛은 순간이요 그것은 이내 주름지고 문드러지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더냐.
그대들은 살의 사람이 아닌 뼈의 사람이다. 본질의 인간이다
뼈로 남아서라도 자식을 고이는 존재, 그것이 바로 어미가 아니더냐.
2012. 7. 효명고등학교
며칠 전, 통영 아름이의 기사를 접했다.
어미에게 버림받고 아비의 사랑도 알지 못한 채 외로이 자라다 색마에 찢겨 하늘로 간 아름이.
그 가여운 영혼을 품어주지 못한 우리의 냉담함이 부끄러워 나는 하루의 곡기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