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전화......,
깊은 밤이었다, L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수화기 너머로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지내시죠?"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냥 전화했어요."
L은 그냥 이라지만 여운을 남기면서 언제 서울에 올라오면 연락하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재작년이었나. 그때도 이렇게 깊은 밤에 전화를 해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었다.
울음이 그치길 기다리다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L은 울먹이며 말했다.
"제가 지금 많이 취했거든요."
"이런 말 하는 것이 바보 같지만 말 할께요."
"우리가 결혼할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말을 끝낸 L은 또 울기 시작했다.
난 잠시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이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 나올만한 시점이었던가?
L과 나는 그만한 관계였던가? 난 다시 물었다.
"어디에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요?"
"회식하고 있는데 잠깐 화장실에 와서 전화하는 거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미안해요. 갑자기 당황스럽게 만들어서."
"저 너무 바보 같죠?"
L과 그렇게 통화를 마친 후 그날 밤을 정말이지 하얗게 세웠다.
다음날 새벽 나는 L에게 기운 차리고 열정적으로 살라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의 글을 적어 시와 함께 보냈다.
그 당시 L이 왜 내게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진실은 때때로 폐부를 찌르는 송곳 같이 견디기 힘들다.
그 이유? 글쎄 굳이 알고 싶지는 않다.
지금은 L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한가?
확실한건 결혼할 사이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잊어버릴만하면 전화를 주고 받는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다.
그리고 이 상태가 지금은 편안 하다.
*****
실컷 울고 난 뒤의 평화
큰 깨달음이란 곧
큰 체념을 일컬음이다.
누구나 어린 날들을 기억할 것이다.
한바탕 속 시원히 큰 울음을 울고 난 후,
마음 속에 오롯이 고여오던 평화를...
주위에 보면, 울다가 느닷없이 실성한 듯
큰 웃음을 웃어 젖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이 큰 체념을 한 후,
모종의 절실한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임에 틀림없다.
-최동건의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