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언어 거룩함과 거리가 먼 이들이 거룩을 입에 담을 때 역겨움이 치솟는다. 속이 켕기고 허한 인간일수록 외양의 화려함에 집착하듯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철부지 인간일수록 언어에 대한 경건주의는 자못 엄숙하기까지 한 법이다. 요 며칠 보수 일간지와 인터넷 찌라시를 도배하고 있는 나꼼수 김용민의 막말 파문을 보면서 나는 오래 전 '호박씨 까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가 주홍글씨를 박아 넣은 두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연대 교수 마광수가 그 하나고 낭인 묵객 장정일이 다른 하나다. 마광수가 제기한 성적 담론이나 작가를 영어(囹圄)로 이끌었던 장정일의 작품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들의 글이 우리 사회의 담론을 보다 다원화할 수 있는 가치 정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허나 중세의 광기어린 마녀사냥처럼 타락한 시대의 종말을 우려하는 경건주의자들의 횃불이 높이 오르자 마광수는 하루 아침에 색마에 빠진 미친 짐승(魔狂獸)으로 장정일은 음란물이나 유포하는 영혼 없는 글쟁이로 전락했다. 모르면 닭이나 치고 있으라는 게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한 역사의 금언이련만 남의 말과 글을 이해할 깜냥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길 없는 같지 않은 인간들이 개가 되고 소가 되어 경쟁하듯 우짖으며 타인을 정죄하고 고발한다. 세월이 흘렀어도 경건주의자들의 파수대는 여전히 굳건하고 먹잇감을 추적하는 그들의 후각은 예민하게 살아있다. 5년 전 정동영을 패륜의 인간으로 격하시키고 4년 전 정청래를 막된 인간으로 끌어내린 보수의 사냥개들이 이제 김용민이라는 만만하고 손쉬운 먹잇감을 물었다. 한번 문 먹이는 절대 놓는 법이 없는 타고난 근성으로 그들은 김용민을 갈갈이 찢을 것이다. 김용민의 말을 변호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의 말은 분명 잘못되었다. 아무리 말이 행해진 시대적 맥락과 사회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언어는 쉽사리 용서받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는 자기의 언어로 묶여 이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 이해인의 시구처럼 내가 뿌린 말의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 맺을지를 헤아려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허나 엄숙한 표정과 고상한 언어로 김용민을 정죄하는 이들을 위해 내가 하고픈 말이 있다. 무슬림의 꾸란에 누구나 알고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격률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를 무차별적인 보복의 논리를 정당화한 것으로 착각하곤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무함마드는 자기가 당한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을 통해 피의 보복과 확전을 금한 것이다. 누군가 나와 가족의 눈을 상케 했다면 나의 보복은 상대방의 눈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김용민이 과거에 행한 부적절한 말을 기화로 그의 현재와 미래까지 부정하지는 말자. 인간은 누구나 변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걸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도킨스류의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된다. 김용민에 대한 훼폄을 넘어 이를 나꼼수의 진정성과 진보 진영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계기로 삼지는 말자. 당신이 유영철의 가족이나 조승희의 친구라고 해서 비난받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좌불안석의 곤혹감에 빠져 있을 김용민에게 몇해 앞서 낡아가는 인간으로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선거의 당락과 무관하게 이 일을 통절한 참회와 치열한 성찰의 계기로 삼길 바란다. 그대의 참된 승리는 선거의 당락이 아닌 그대 영혼의 진보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혹여 당신이 작금의 이 사태를 보수연합의 비겁한 책략 쯤으로 여긴다면 그대는 거룩한 언어로 쓰나미를 하느님의 심판으로 규정하는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머물고 말 것이다. 산천의 진달래가 봄빛을 받아 새로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을 이 봄 그대의 거듭남과 참된 승리을 기원한다. 2011년 세밑 소백산, 깔대기 정의 조속한 석방을 기원하며
자투리
2012-04-06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