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만한 효자 없다
또 어머니의 전화다.
"기환아, TV가 안 나오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브라운관 리모콘 먼저 누르고 스카이라이프 리모콘 누른 다음 외부입력을 눌러 보세요."
"니가 하란 대로 혔는디 안 나온다야."
"그러면 스카이라이프의 초기화 버튼을 눌러서 재부팅을 시켜 보세요."
"그건 뭔 소린지 모르겠고."
"아니, 지난 번에도 제가 설명.... 알았어요. 금방 갈 게요."
평택의 어머니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비디오플레이어의 작동법을 자꾸만 까먹는 아버지(신구)를 위해
설명법을 적어 내려가던 정원(한석규)의 그 눈물나던 모습을 말이다.
내 어머니도 총기 하나는 알아주던 분이었는데 이제 TV 작동법도
여의치 않은 노인이 된 것이 왠지 모르게 비감하고 서럽다.
허나 내가 영화 속의 정원마냥 단명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어머니의 호출에 언제든 출동할 수 있음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이랴!
부리나케 이십분을 달려가 30초만에 문제를 해결했다.
현관을 나서려는 내게 어머니는 V자를 그리며 한 말씀 하신다.
"우리 큰아들이 기술자네, 기술자여!."
요즘 세상이라고 해서 삼강행실록이나 열전에 나오는 효자가 어찌 없으리요마는
너나없이 생계를 도모하기에 바쁜 자식들은 부모 슬하를 떠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자식을 놓아보낸 노인들에게 TV만한 효자도 없다.
드라마로 재미 주고 아침방송으로 눈물 빼고
예능으로 웃겨 주고 종교방송으로 은혜 주는 TV.
네가 효자다.
너야말로 이 시대의 노래자고 왕상이고 맹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