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소년.
"왜, 월드컵도 안 봐요?"
"당신을 좋아하는 남자는 조금 특별해야 되지 않겠어?"
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는 여고생 셋, 툭하면 집을 나가는 여고생 셋이 모여 떡볶이에 오뎅을 찍어 먹으며 소주를 마시며 수다를 풀기 시작한다. 경기침체로 인한 삥값의 감소에서 비롯되는 사회활동의 축소화에 대한 타결방안, 해결모색으로 시작하여 이내 누구 하나를 콕 찝은 험담으로 옮겨간다. 그 대상은 (지들 눈엔) 쥐뿔 잘난 것도 없이 잘난 척을 일삼아 몹시 재수가 없고 그 언변의 면면이 심하게 거슬리는 별로 예쁠 것도 없는 반장년이다. 한참을 신나게 노가리를 풀던 중 그날따라 내내 조용하던 한 여고생이 반장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분이기를 조진다. "이년이 떡볶이가 목구녕에 걸렸냐? 갑자기 헛소리야? 왜? 오뎅국물이 부족해?" 험담은 편파적이여야 즐겁다.
월드컵이다. 상대의 오프 사이드가 인정되지 않튼 통에 대한민국이 한 골을 먹게되었다. 선수, 감독 모든 거센 항의를 연발하는 때와 동시를 이루어 4800만 대한민국 붉은 악마들은 적이라 규정한 상대팀을 향해 내 아비를 찌른 원수마냥 죽일 기세를 브라운관에 쏟아낸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해설위원이라는 자가 말 하기를 "아니에요~ 저거 오프 사이드 아니에요. 저기 자세히 보시면요, 왼쪽에서 들어오는 선수가..." 라며 몹시도 이성적인 논리로 사태를 읽어낸다면, 그의 공정한 판단에 대한 박수와 찬사가 아닌 서슴없는 손가락질을 동반한 강렬한 쌍욕의 퍼레이드를 대략 42박 43일 정도 줄기차게 보내줄 것이다. 스포츠 중계는 편파적이여야 재밌다.
"나꼼수" 라는 프로그램을 안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나는 그 "나꼼수" 라는 것이 "나는 가수다" 를 패러디한 "나도 가수다" 라는, 어디 개그콘서트 같은 데서 쓰이는 유행어의 일종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연일 신문지상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며칠 전에야 그게 딴지 총수 김어준을 위시로한 정치관련 방송인줄 그제서야 알았다. 이후로도 나는 "나꼼수" 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나가수" 도 안 본다.
TV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제 아무리 TV를 보지 않겠다 굳게 다짐하여도 제 의지와는 무관한 상황에서 잠시잠깐이나마 TV를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는데, 그날이 그랬다. 연인과의 이별에 합의하고 다정하게 소고기를 구워먹으며 부족한 소주를 위해 종업원을 불렀으나 그 젊은 종업원 녀석은 소주를 날라다주고 불판을 갈아주며 부족한 음식을 채워줘야 하는 제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망각한 채, 벽면에 걸려있는 TV에서 방영되는 "나가수" 를 홀린 듯 보고 있었고, 기가 찬 표정으로 녀석을 보고 있다가 나도 얼떨결에 "나가수" 를 언듯 보게되었다. 그게 전부다.
이성과 감성에 동시작렬하는 눈물은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눈물 많은 내가, 나이가 먹으면 먹을 수록 더 눈물이 많아져 툭하면 우는 주접을 선보이는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타입의 눈물이다. 그럼 내가 지독하게 싫어하는 타입의 눈물은? 지나치게 이성이 배제되고 필요이상으로 감성에만 호소할 때 비롯되는 그러니까 머리를 이해시키지 않코 가슴에만 집중포화를 때려데는 그런 눈물, 여기에선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광기가 형성된다. 그렇게 형성된 광기는 빛의 속도로 내게서 타인으로 타인에게서 타인으로 전이되어 집단화의 양상을 띄어가며 점차 권력화되어 간다. 이제부터는 이성에 기초한 논리라는 것은 소수의 의견으로 묵살되고 삽시간에 개소리 헛소리로 변이된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 왈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그리고 박멸한다."
괴벨스의 대중선동선전전술은 대한민국 유사이래 끝임없이 탄생되었고 재탄생되었으며 정치, 경제 그리고 언론에서 탁월한 흥행을 일궈냈다. 영화 안이 아닌 영화 밖에서 최고의 연기와 연출력을 보여준 심형래의 케이스도 이에 기초한다. 내가 좋아할 리 없다. 떼 싸움은 내 체질이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리 좋타가도 남들이 다 좋타고 하면 싫어지는 독고다이적 청개구리형 타입이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겨하다가 남들 다 타니까 대번에 끝어버렸고, Dslr 카메라가 대중보급화 대는 통에 개나 소나 심지어 기린까지 들고다니게 될 때 필름으로 전향했으나 역시 개나 소나 심지어 기린까지 하는 게 사진이라 사진도 안 찍고 좋아하지도 않게 되었다. 나는 유행을 거부한다. 그게 무엇이 되었던! 설령 정의라 할 지라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에 대한 시위가 전국민적인 축제로 번져갈 때, 꽤나 좋아하는 형으로부터 신문광고를 위한 모금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깔끔하게 땡전한푼도 내지 않았다. 그깟 돈 몇 만 원이 아까워서? 그렇타. 그깟 돈 몇 만 원이 아까워서 안 냈다. 원래 쌩돈이라면 단돈 백 원도 아까운 법이다. 반대로 공돈이라면 십 원도 땡큐지~.
인도, 중국, 캄보디아 등지를 여행하며 가난하고 굶주린 아이들에게 맛잇는 사 먹이고 나눠준 돈은 못 잡아도 백이다. 백 원이 아니라 백만 원. 빛만 천만 원이 넘는 놈이 객기를 부렸다라면 할 말 없지만 그거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애당초 아까웠다면 그짓을 할 리도 없겠으나, 나눠줄 수록 그 베품에는 지고한 쾌락이 있음을 알았고 해서 즐거웠다. 무관심에서 전이된 무의미, 거기에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내게 남한의 촛불잔치는 그러했다. 나는 명백히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다.
불편한 삶이다. 동화되지 못 하는 삶은 불편할 뿐더러 외롭고 험하다. 일치단결 민중만세를 외칠 때 "저게 바로 파시즘이야" 라며 당당하게 아니요를 선언하는 인간, 철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비전향 장기수의 오랜 감옥생활. 슬프고 아프고 또 슬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폼 난다. 멋지다. 자신이 가진 자신만의 신화를 써 나가는 인간. 외롭고 쓸쓸하나 높다. 오죽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고 숫타니파타에 특기되어 있겠는가. 외따로 떨어져 홀로 돋보이는 인간.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나는 월드컵도 안 본다.
나는 "나꼼수" 를 들을 생각이 없다. 오합지졸의 정치판을 향한 명쾌한 해학과 풍자이던,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되지 못 한 분노와 증오이던 혹은 개인의 입신양면에 근저한 대중기만이던 뭐던 간에 나는 싫타. 목에 칼이 들어와도(정말?), 천금을 안겨준다 하더라도(음, 이건 쫌...) 싫은 건 싫은 거다. 이방인으로 배타되는 것보다 대략 이만삼천 배즘 두려운 건 One Of Them 으로 인한 가치하락이다.
나르시즘이란, "나는 당최 누구인가. 어떤 인간인가?" 류의 존재론적 허무로부터 잦은 위안과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주곤 한다. 비루한 생을 지루하게 연명하는 내게 나르시즘은 최고의 마약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한 점 믿어 의심치 않커늘, 이 나르시즘이 나를 구원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