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소년
참 많이도 맞고 자랐다. 본래가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그렇게 태어났다면 그 형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혹은 자라면서 절로 길러진 탓인지 여튼 삐딱한 인간의 대표주자라고 해도 옳을 나는 그 삐딱한 성격에 힘입어 참 많이도 맞았고 여러모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양한 부위별로 맞았다. 역시 맞아 본 기억으론 고등학교 시절에 버금가는 때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물론 군대시절에도 참 많이 맞았고 다양한 도구가 추가되어 맞았지만,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를 능가하기는 많이 어렵다.
본래가 그렇게 타고났다거나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버지의 형질을 이어받았다거나 하기보단 자라면서 절로 길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느다랗고 하늘거리다 때론 살랑거리기까지 하는... 한 마디로 별 쓸모가 딱히 없는 관상용 몸매를 지녔던 것에 비해 그 맷집은 가히 동급최강을 자랑했으리만치 훌륭하였고 훌륭하였으니 자랑할만 했으나 딱히 그런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산수를 넘어 산수의 아버지 혹은 삼촌뻘이랄 수 있는 수학에 돌입하여 죽을 쓰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던 내게도 30분 걸려서 하는 과제와 3분이면 쫑내는 채벌의 역학적인 수지타산은 그리 어려운 해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맞고 깔끔하게 끝냈다.
식당은 단골이라면 깍아주거나 덤으로 얹어주는 것이 인간세상 인지상정의 도리이겠으나, 내게 가해진 매질은 깍아주는 일이 절대 없이 덤으로 얹어주는 일들만이 있어, 나는 쩜오 혹은 두 배로 맞았다. 핑계는 같다, 단골이라 그런단다.
지각 역시도 빼놓아선 서운한 단골메뉴였는데, 그 연유에는 나근나근하다가 낭랑해졌다가 이내 촥 가라앉는 최명길 누님의 음악살롱을 듣고 있노라면 이심전심의 상태에 놓여 촥 가라앉는 마음으로는 이대로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해서 늦었다, 라는 근사한 핑계를 데다가 더 맞았다. 선생은 내게 물었다. "보충수업비는 왜 내냐?"
그런 내가 대학에 이르러 F4로 거듭나는 건 당연수순이었다. 꽃보다 남자처럼 꽃보다 예뻐서... 라면 투석으로 응할 테니 접어두고, 다들 짐작하시듯 학사경고를 시원스럽게 받아들이고 0점대 학점을 기록하였다.
선생들에게 맞은 것이야 두 말이 필요 없고(한 말만 주세요~) 친구들에게도 맞았고 선배들에게도 맞았으나(그렇타. 가르침은 스승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누나들과 후배들에겐 안 맞앗는데 뒷 구멍으로 흘러다니지만 분명하게 내 귀에 들어오는 욕을 얻어들었고 그 욕의 대부분은 "그렇게 싸가지 없을 수가 없더라" 라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고 있는 면면히 옳은 말이었으며 이후 십수 년 내 인생을 지배해오는 오래 묶어 향기나는 살가운 말이었다, 라는 게 불행 중 불행이었다.
무수한 매질에도 신음소리 한 번 없이(몰라, 한두 번 있었을랑가) 굳건하고 의연하게 매질을 견뎌내던 내게도 고등학교 전부를 털어 지상최대의 과제였던 과제를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왜 지상최대의 과제였나면, 그건 매질의 강도가 아닌 숫자에서 발휘된 것,더군다나 하루 이틀에 쇼부를 칠 수 없이 장고의 시간을 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장정을 기록하는 형식은 복리를 넘어 사채 or 달러를 지나 말끔하고 간명하게 곱빼기라는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하루 한 대, 이틀 두 대, 삼일 네 대, 사일 여덟 대 오일 열여섯 대......깔끔하지 않은가.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본래가 괴로운 시간이 가진 숙명이란 게 그렇찮은가. 해도 버텼고 맞았고 또 버텼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다음 단위가 글피인가?)... 과제는 점차 늘어갔으며 물론 과제를 하지 않았고 시간이 늘어갈 수록 매질은 활기를 띄였으며 눈에 띄도록 부풀어 올랐고 넘쳐나는 매질의 양에 따라 과제의 양 또한 넘쳐 흘렀으니, 나는 또 당연히 과제를 할 도리가 없었다.
회자정리라 했다. "모든 것은 끝난다. 고통 또한 그렇타" 라는 루이제 진저의 진술은 이런 때를 위무하기 위하여 준비되었으리라. 밤을 세는 고스돕도 새벽빛이 스며드는 낮은 조도에서 의미를 잃기 시작, 해장국 한 그릇으로 마무리되듯, 내게 가해진 매질 또한 분명한 종착역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마지노선은 512대 라는 만만찮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선각자의 외롭고 슬픈 운명이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카운터가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올라갈 무렵, 채벌이라는 미명하에 선도라는 허울좋은 명분아래 무람없이 생성되는 무차별적인 학교폭력과 인권찬탈에 맞서는 자는 나 하나 였다.
드디어 마지막 날, 그러니까 저번 수업에서(감사하게도 매일 매일 있는 수업은 아니었다) 256대를 맞아낸 내가 대망의 512대에(무슨 메모리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미는 것은 예의수순, 도마 위에 오른 생선이 칼을 두려워할 일 없듯 마지막을 향하는 나의 걸음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를 외칠 준비로 보무도 당당하게 교탁으로 향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대략 300대즘을 지날 때였을 것이다. "잠깐! 선생님도 힘드시죠. 잠시만 쉬었다 하시죠. 나도 몸좀 풀고."
나를 기억하는 아이들은 모두 그날의 일을 기억한다. 지금도 그날의 일을 회상하는 친구들 중 몇몇은 지난 날에서 복제된 감정의 폭을 이기지 못하고 종종 눈물을 훔치며 나를 올려다보곤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스승에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 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이빨이 앙당물어지고 눈에는 핏기어린 오기가 생겨났으며 가슴에는 당금질된 투지가 불타올랐다.
아, 한 번 만났어야 했는데, 그 선생. 그래야 무량하기 그지 없는, 짝을 이룰 상대가 없었던 그 스승의 은혜를 (선생께서 내게 가르쳐주신 방식처럼) 곱으로 갑아드렸을 텐데. 나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스승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미욱한 인간인 내게 제 아무리 어렵고 험한 길이라도 전 존재를 걸어 반드시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선생님. 선생님이 아니 계셨더라면 어쩌면 저는, 인간 본연의 자유의지를 폐기하고 획일화를 주장하는 사회에 마치맞은 노예가 되어 그냥 아주 주야장천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는 모범시민으로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은혜 가슴에 아로새겨 숨 쉬는 내내 꼴리는 데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