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가 되는 나
예수를 믿는다고 인간의 구원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예수 믿음'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의미가 기술되어야 한다.
그 의미가 기술되고 실천될 때만이 그 믿음은 검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保持)한
인간의 신체 속에서 '검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도올, <중용한글역주>. (p.37)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는 있으나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말씀으로 구원 받을 수는 있으나 '말씀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며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는 있으나 '행함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나니.
나부터도 그렇지만 오늘 우리의 교회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는 '찰떡'같이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지행합일의 하나님 명령은 나몰라라 하는 신자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하루가 멀다 않고 전국의 교회에서 말씀의 성찬이 차려지고 방성한 믿음의 고백이 온 예배당을 울린다.
허나 세상을 향한 기껍고 느꺼운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 선장이 하선한 '우리만 구원'호의 방주에
기를 쓰고 오르려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무망하고 어리석은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를 내려 놓은 배를 타고 이르는 곳이 어디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하여 나는 홀연히 속가의 연을 끊고 청담의 세계로 떠난 老莊류의 인간보다는
상갓집 개 취급을 마다 않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뜨겁게 현실의 문제를 고민했던
노나라의 공구에게서 예수의 참모습을 본다.
존경받는 은자였던 장저와 걸닉이 도도히 흘러가는 천하를 어찌 바꿀 수 있겠냐며
자로를 통해 공자의 유세를 힐난할 때 중니는 무연해하면서도 이리 답하지 않던가.
"새들이나 짐승과는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 내가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鳥獸不可與同群,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성숙한 신앙은 남이 만든 방주에 무임승선하는 구태를 벗어야 한다.
내 힘으로 믿음의 돛대를 높이 달고 말씀의 키를 굳게 쥐고 행함의 노를 쉬지 않을 때,
안온한 관념의 천국이 아닌 요동하는 현실의 격랑으로 기꺼이 노저어 갈 때,
비로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참 얼굴을 만나 뵐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