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의 무덤 앞에서
유림의 저술은 내 일 아니고 / 儒林述作非我事(유림술작비아사)
나라의 흥왕성쇠도 잘난 이의 것 / 帝室衰旺付英賢(제실쇠왕부영현)
눈앞의 인생 무사히 건널 방책이란 / 眼前身家康濟術(안전신가강제술)
원커니 책선하는 좋은 벗을 얻음이라 / 願得良友加策鞭(원득양우가책편)
분수 넘친 망상은 끝내 무익하니 / 分外妄想終無益(분외망상종무익)
그 누가 보았으랴 범부가 신선됨을 / 誰見凡骨能成仙(수견범골능성인)
다만 장차 참맘으로 실사구시 행하면서 / 但將實心做實事(단장실심고실사)
도의의 문안에서 이 몸이 살아가리 / 道義門中度此身(도의문중택차신)
긴 웃음 한 소리에 실려가는 인생인데 / 長笑一聲乘化去(장소일성승화거)
옛부터 잘 죽은 이 몇몇이나 되던고 / 古來寧沒有幾人(고래녕몰유기인)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벼슬에 맘 두지 않고 평생을 학인으로 살다간 이.
주희의 뼈다귀만 핥던 동학(同學)들과 달리 일찌감치 우주의 신비에 눈을 돌린 사람.
북경의 유리창에서 만난 중국의 지기들을 종신토록 잊지 않았던 진정의 인간.
다석 묘소 가는 길에 들른 담헌의 유택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옹색하지도 않은 것이 꼭 그의 글과 닮아 있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담헌의 무덤 앞에서
그가 생전에 느꼈을 처절한 고독을 생각했다.
이기론이라는 종지에 담긴 물을 대양으로 여기며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한사코 도리질하던 조선에서
개명한 과학자이자 계몽주의자였던 그는 얼마나 심한 질식을 느껴야 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학문의 연찬을 마다하지 않은 담헌이야말로
그가 지은 위 시의 마지막 일절마냥 진정 잘 죽은(寧沒) 몇 사람에 속한 이가 아니었을까나?
2011. 8. 천안 수신면 장산리, 담헌 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