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표류기.
# 5. 안주나의 크리스마스 네 번째.
한 판 뜨자는 거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그런 인간들. 제 가슴 쫙 펴내지 못하는, 본디 생겨먹은 마음 씀씀이 쪼짠하며 또한 찌질한. 당최 개척정신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개미 콧구녕의 코딱지 만치도 없는, 그야말로 남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첨부하려는 후안무치, 불학무식, 파렴치한인 족속들. '사내다움' 이라는 단어를 진즉에 용도폐기시킨 막장의 쫌팽이들. 내가 말한 그 놈이 그런 놈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코 기억 할 필요도 없는 녀석은 이스라엘 태생으로 인도에 산 지는 십 년, 이곳 고아에서만 오륙 년을 보냈(던지 말던지)다고. 스토리만 들으면 뭐 있어 보이는 놈이었지만, 내게 뭐 같은 놈에 다름 아니었다.
날이 춥건 덥건, 눈이 오건 말건에 관여치 않코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전용 음악들, 그 생경함이 좋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로 화기애애한 분이기를 연 잊고 있을 즈음, 오고 가기를 반복하며 한 마디 두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던 그 놈은 아예 자리를 합쳐 내 맞은 편에 닿았다. 친히 익숙한 호주 여성 캐런과 셀리를 떠나와.
이후엔 본격적으로 수다와 사진에 동참하더니, 음악 이야기로 메이를 집중공략하기에 이르렀는데, 슬슬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그 주름처럼 어그러지는 내 심사와 부아를 못 봤거나 본 채 만 채하며,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아, 갈등 때린다. 밟아?
갈등의 시간이 길어야 했던 것은, 평소와 같은 일상이 아니었기 때문. 평소 사람들의 학을 떼고 치를 떨게 만드는 내 꼬장과 깽판을 인도 남서부 안주나 해변의 크리스마스에서 되 살릴 수는 없었기에. 헌데 녀석은 계속해서 줄기차게 초지일관 점입가경 나를 긁어 덴다.
90년대 후반 이후 음악을 거의 듣지 않코 사는 나는, 메이가 좋아하며 요 사이의 대세라는 140bpm을 넘나드는 테크노는, 소음과의 경계가 무색하다 느껴질 정도의 문외한 이었다. 패착은 거기서 비롯, 그 음악으로 밥 벌이를 하는 이스라엘 녀석은 메이와의 음악 취향에 혼신의 힘을 다해 갓 가지 썰을 풀어뎄고, 자신의 파티에 꼭 와달라며 사정을 잊는 사이 지나친 스킨 쉽을 일 삼고 있었다(라고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지금도 열 받는다).
38살 먹은 늙수그레 한 인간이(38살을 비하하는 발언은 아니다) 20살 메이에게 찝적데고 있는 꼴을 보자니, 평소 어린 여자들을 좋아했던 내 행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구나, 라는 죄책감도 없이 무럭 무럭 열이 받았다. 점차 불편해하며 몸을 빼는 메이를 보고 '이제 밟자' 까지는 아니더라도, 찬바람 부는 한 두 마디는 뱉어야 겠다, 마음을 굳히려는 찰나, 너무 한다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나 열 받는 것을 봐서 였을까, 캐런과 셀리가 먼저 제지 한다.
꼭지가 확 돌 지경에 다다를 즈음, 메이와 카쥬나가 일어서 가겠다고 한다. 시간도 늦었고 술도 많이 먹었다고. 하기사 낮부터 마신 술이 자정에 가까워 졌으니, 취기가 돌 만은 하다. 다행이다, 나 돌기 전에 일어나서. 맥주 값을 내러 가는 메이를 막아 세우며, 에스코트를 자청했으나, 그녀들은 둘이 갈 수 있으니 걱정말고 마시라고. 그리고 제스춰와 함께 전화 하라고.
잘 된 일이다. 나는 여기에 남아 필히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만약 이대로 어디를 가야 한다면 들끓는 이 불덩이를 나는 어쩌란 말이리.
착한 말 하는 그녀, 캐런.
마음에 둔 여자 앞이라면 위 아래를 불문한다는 수컷으로써의 신념은 물론이요, 싸움에 있어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는 민족적 자긍심에 부합하며, 나아가 동양 여자들에게 환장하고 침 흘리는 서양 놈들의 속물근성(?)을 생각하니, 이는 범 아시아적인 차원에서라도 결단코 응징이 있어야 할 일. 인내의 수치는 바닥을 밑 돌고 있었다.
메이에게 전화 하고 싶다며 번호를 알려 달라는 녀석. 이 즘 되면 '열 받아서 확 뒈져버리세요'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코 '진 아람볼 가지 말고 우리랑 놀자'라는 세살배기 아이들도 유치하고 민망해서 안 하는 뻔한 속셈(다음 날 메이와 카쥬나와 나는 인근 해변 아람볼로 가기로 했고 것을 놈에게 말한 모양)을 내 앞에서 늘어놓고 있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갈 때 까지 갔다. 지구 범죄율 98.7%를 전담하는 미 자본주의의 중추신경 역활을 하는 유대인들. 역사상 전무후무한 광기의 또라이 아돌프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보다 열과 성의를 기울여 완전한 성과를 이뤄냈다면, 지구는 보다 평화스러운 별이 되었을 테고, 나는 이 놈과 지금 여기에 앉아 이 따위의 수작을 듣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몰상식한 생각에 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지독히도 싫어지는 놈을 분명하게 응징받아야 할 유대인의 반열에 끼워 넣고 보니, 독수리 오형제의 부재로 인해 위태로운 지구평화 수호를 위해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마져 불러 일으켰다.
피식 웃으며 담배 하나, 목소리를 깔았다. "너 뭐하는 짓이야. 메이는 내가 데려온 내 손님인데, 너 때문에 지금 갔잖아. 그리고 뭐. 아람볼 가지 말고 같이 놀자고? 나 너에게 관심 없다. 너도 나에게 관심 없지 않냐? 사내 새끼가 비겁하게. 메이에게 관심있으면 메이에게 직접 말해. 여자들도 그런 짓은 안해(연습했던 영어가 술술 나온다)."
슬쩍 당황해 하는 녀석. "진 왜 그래? 난 네가 카쥬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Bull shit!(영화에서만 듣던 말을 처음 해 봤다. Shut the fuck up이라고 하긴 아직 이르고, 게다가 캐런과 셀리도 있고)
"내가 여기 안주나에 처음 온 날, 메이를 봤다. 그리고 메이를 찾아 오늘에 까지 3일을 헤멨다(인정한다. 뻥 좀 보탰다). 그리고 오늘 메이를 만나서 여기로 왔다. 근데 네가 메이에게 무슨 짓을 했냐? 닥치고, 이제 어쩔래?"
"싸워야지" 잠시의 어색한 침묵 속에 서로를 노려보는 사이, 더 없이 명확하며 더 이상 시기적절할 수 없는 맞춤형 한 마디는 캐런의 입에서 나왔다. 요런 요런 괜찮은 여자 같으니라고. 캐런이 급작스레 예뻐 보인다.
"싸움이면 싸움, 술이면 술, 니가 제일 잘하는 걸로 해. 난 다 좋아"라는 선공에 다시 그녀 말한다. "팔 씨름은 어때?" 애가 애가 이렇게 기특한 애였어? 별반 잘하는 것 없는 내가 요상스레 잘하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게 팔 씨름이다. 겸손하고 저렴한 몸 무계가 한 몫을 한다 할 지라도 참으로 쉽지 않은 한 손가락 푸쉬 업이 나는 된다(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는 세 손가락으로 한다지). 그만치 팔 힘이 나쁘지 않타는 말. 참고로 팔 씨름이 Arm Restle 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헌데 녀석 봐라, 제법 자신이 붙어 있던 모양인지, 아님 지 놈도 내게 열이 받아서 인지, 어깨 들썩이며 흔쾌히 시합이 응하려 한다. Ok 너 뒤지셨어요, 라는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기 전, "그냥은 심심하고 타이틀이 있어야지, 뭘로 할까?" 이번에도 캐런, "술 값 뒤집어 쓰기, 어때?" 캬, 이건 뭐 브라보를 외칠만한 결정이다.
사내 새끼들이 답지 않케 수다가 길어지다 보고 언성이 높아지다 보니, 마주 잡은 손 주위로 여럿의 시선이 집중된다. 놈은 벌써부터 손 아귀에 잔뜩 힘을 불어넣고 있었고, 설마 지겠냐? 라고 생각하는 나는 느슨하게 선수를 양보하던 차, 캐런이 심판을 보며 중앙을 정확히도 오차 없이 정하고 시작을 준비한다. 물었다. "캐런 너 누구 편이야?" 그걸 몰라서 물어? 라는 눈빛으로 "I'm yours."
조악한 청춘에 대한 노스텔지어.
팔 씨름에서 3초란 승부가 나도 여러 번 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헌데 그 3초를 나란히 흔들림 없이 마주 잡고 있다는 것은, 둘의 힘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만치 동등하다거나,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는 것. 3초를 마주 잡는 사이 주변의 분이기가 절정을 달리는 즈음, 승부는 순간에 갈렸다. 대략 0.34초? 3초의 진원은 후자 쪽이었다. 누가 이겼냐고? 묻는 바보는 없길 바란다.
피로 회복제, 박카스의 광고가 생각났다.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왼 손을 내세우며 묻기를 "한 게임 더?"
캐런의 포응과 몇몇의 박수. 이것 봐라, 갑자기 기분 좋아지네. 하하하. 자 마시자, 며 잔을 부딧치니, 그 전까지 안들리던 음악이 귓전을 때린다. All I want for christ mas is you~ Uoo uoo baby ~. 급작스레 좋아진 기분으로 여러 번 잔을 부딧치며 cheers를 외치며 목청을 높이며 지독히도 못 부르는 노래를 흥겹게도 불러 제끼는 사이, 녀석은 조용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흥이 더 난다. 하하하.
보드랍게 목젓을 때리는 킹 피셔, 짐 모리슨의 발광 같은 춤을 흉내내며, 주변으로 하얗게 피워오르는 마리화나의 향취 속에 그만 정신 줄을 놓을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떻고 이러면 어떠랴, 오늘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던가'라며 슬슬 미쳐가는 사이, 녀석이 자리를 뜬다. "어이, 맥주 고마워" 한 마디에 돌아선 채로 가볍게 손을 흔드는 녀석을 뒤로 하고 부어라 마셔라의 연속. 캐런과 셀리도 함께다.
지긋하게 감은 눈, 한 손엔 담배 한 손엔 맥주를 들고 추는 듯 마는 듯 허우적거리는 손 짓 발 짓따라 실제할 리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어불성설의 시공이 열리는 것 같았다. 군중들 속에서 볼륨을 높인 이어폰을 낀 덕에 홀로 들판에 내 던져진 환상처럼.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따라 붙는 지난 시간에 대한 영상.
지나 온 삶.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애매모호한 텍스트,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복잡미묘한 컨텍스트. 그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시간들 속에 맥 없이 던져져 실 없이 살아온 지난한 날들.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든 미세한 확률이 안내한 지금의 일탈만으로도 아니, 이제는 그 무엇 하나 이유를 달지 않터라도, 난해한 세상에 대한 이해에 앞서, 지독한 자기부정으로 연명해 온 스스로와의 화해를 청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절정의 취기가 뱉어낸 잠시의 착각일지라도.
터미네이터가 아닌 나, 마시면 취하는 것이 인지상정. 나 오늘 너무 달렸다. 더 이상 달렸다간, 스스로와의 화해고 나발이고, 지나친 음주가무로 인해 과로사를 맞이 할 것 같았다. "평소 그렇게 먹고 놀기를 좋아하시더니 그만......"이라는 소리를 병풍 뒤에서 향내 맡으며 들을 수는 없으니, 피곤한 내색을 힘껏 내 보이며 마무리 잔을 나누는 시각. 캐런은 제법 진지한 톤으로 말한다.
"Jin 내일 안 가면 안 돼?"
애는 또 왜 이러나, 캐런 너도 메이 좋아하니?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