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표류기.
# 4. 안주나의 크리스마스 세 번째.
갈등의 시간 저녁 6시.
매혹적인 순간 앞에 서면 나의 오늘이란, 세상 수 많은 가능성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닳게 된다. 그것이 선택 가능한 순간에서 비롯되었다면 희뿌옇고 흐릿한 슬픔은 보다 명확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니, 선택이란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버리는 것, 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의도된 선택에는 불가피한 상실이 뒤 따르게 마련, 이는 불가분의 셋트 상품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선택이라 할 지라도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은 불가능하다.
유사 이래로 최 고단수의 갈등을 야기하는 짬뽕과 짜장, 매일 마주해도 매번이 새로운 고민이 아닐 수 없는 그 선택에 짬짜면이 출시 되었다 하나, 것은 온전한 짜장의 맛도 완전한 짬뽕의 향도 아닌, 그저 이합집산 합종연횡의 조악한 꼼수에 지나지 않는 것. 그렇타. 우리가 그 누구라 한들, '그래, 결심했어'라며 두 주먹 불끈 쥐어보아도, 두 가지의 삶을 동시에 살아낼 수는 없는 존재, 그로 인한 슬픔 역시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말은 나 안테 걸고, 밥은 재들이랑 먹어? 이거 개새끼 아냐?" 라는 독한 말도 없이, 그저 못 본 척 쉬이 쌩까는 것도 아니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가는 그 캐내디언 걸을 보고 있자니, 나는 후회가 몰려 들었다. 호강에 초 치는 소리 한다고 욕 해도 어쩔 수 없다. 섣부른 결정이 야기한 악수(惡手) 였을까. 슬픔이 제 얼굴을 드러낸다. 오래도록 잊지 아니할.
'내 너를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안주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심경을 굳히고 있을 때, 그 복잡한 속내를 알 길 없는 뽀샤시한 소녀 둘이 점차 클로즈 업 되며 다가 온다. "Hi Jin". 채 걷히지 않는 물기를 두른 머리카락과 화장끼 없이 맑은 피부톤에 무척이나 걸 맞는 음색으로. 산책을 나서는 듯한 가벼운 차림이 외려 친근감을 높여주는 듯 했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한숨짖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한다"고, 일갈한 시인 고은. 하면 된다, 라는 무대포 정신이 아니라 안 되는 것은 쿨하게 포기 할 줄 아는 것이 사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타, 모름지기 사내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라고 작심이 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도 따라 환히 웃었다. Hi Mei & Kajuna.
'난 왜 오 분도 진지하지 못한 인간일까' 라는 생각 이전에, '재들은 무슨 마음으로 저리 이삐게 하고 나왓을까' 라는 의문을 넘어서, '가만, 진(Gin)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라며 고민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니,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나도 참 촌스러운 놈이다. 나하고 진하고 무슨 사이라도 된다고. 우린 그저 이름의 발음이 같아(Gin & Jin) 쉽사리 친해졌고, 술 좀 마셨고, 그냥 ,뭐, 좀, 그저, 한 번, 단지, 하룻......그런 사이 아니던가(??), 라는 결론에 도달하니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결심이 섯다. 그리곤 본래 가고자 했던 진(Gin)이 있을지 모를 '씨 호스' 레스토랑과는 다소 덜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진(Gin)과는 무관하게, 씨 호스는 해변의 중심이라 그저 시끄러워서, 또한 나는 talking about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인간이라서, 그래서 그런 거다.
꽃띠 처녀들과의 저녁 식사.
돌이켜 보면 참으로 오랜 시간, 갓 가지 이유로,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장소를 오가며 술을 마셨다. 가출을 도모하는 친구의 성공을 빌어주며 '캡틴 큐' 를 마셨고, 소개팅에 갔다가 자신의 애인을 소개받은(더불어 싸데기 까지 맞고 온)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소주를 마셨고, 한 됫박의 땀을 흘려가며 나락 가마니를 짊어지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오늘, 생애 서른세 번째의 크리스마스를 맞아, 시간을 넘고, 계절을 바꾸며, 생경한 언어로, 낯 모르는 소녀 둘과 술을 마신다. 더불어 필설이 불가한 태양의 추락을 배경삼아.
생각해 보라, 이 보다 윗길의 재미가 있겠는가. 명료하다. 인생 무조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늘도 어김 없이 이어지는 장중한 해넘이, 함께 '스고이'를 외치며 손가락을 치켜들고 메뉴판을 살피며 생각하길, 요 예쁜 것들을 어떻게 요리하지......가 아니라, 어떤 요리를 대접하지 싶어 물어 보니, 씨 푸드가 먹고 싶덴다. 당일에 잡아올린 물 좋은 생선을 산지에서 직접 먹는 선택이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더 없이 훌륭한 선택이었다. 이래 저래 기특한 것들, 같으니라고.
나무 좌판 같은 것에 갓 잡아 올린 생선(이라고 주장하는)들이 좌우로 나란히 하고 있어, 고르는 일도 재미 있었다. 병어처럼 보이는 넓덕한 생선에는 핫 소스, '넌 새우야 가제야?' 라며 정체성에 의심을 품게 하는 사이즈를 지닌 새우인지 가제인지를 여섯 마리 구워 달라고 하고, 메뉴의 다양성을 높이고자 치킨커리에 한국인이 일요일에 즐겨 찾는다는 짜파게티와 이름만 비슷한 짜파티(밀가루 전병과 흡사한)를 석 장 추가하며, 목 마르니, 일단 맥주부터 세 병 가져오라, 는 것으로 고심에 고심을 더한 주문을 마쳤다. 브라보!
내가 생각하는 일본과의 연관 검색어란, 노벨상으로 대표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 오야 겐자부로, 또는 천재적 악(惡)을 표현한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사소설의 대가 나스메 소세키 등을 위시로한 문학 또는, 거장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구로자와 아키라와 영화의 사무라이 오시마 나기사 등등의 인물이었는데, 불행히도 그 부분에 관한 애기는 나눌 수 없었다. 메이와 카쥬나는 스무 살 이었다. 클래식 보다는 모던이 근사하게 어울리는.
그러나 벗트, 청춘남녀가 모여 할 애기 없이 술 마시랴. 아는 것 모르는 것 총 출동이다. 일단 스마프의 기무라 타쿠야, 절정의 미모 아오이 유우, 아오이 유우보다 한국에서 훨씬 인기 좋은 아오이 소라, 필살의 스타일리스트 아사노 타다노부, 애교작렬 우에노 주리 류의 인물을 시작으로, 헐리웃으로 범위를 넓혀 조니 뎁과 브레드 피트에 관한 이야기 들은 뭐, 한도를 정해놓치 않코 즐거웠다. 간단 간단한 단어만으로 빅 재미와 리액션을 최 단시간에 뽑아내는 몹시나 효율적이고 직선적인 대화법.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 하나. 비데가 없어서 불편하다는데, 비데가 Wash let이라는 것을 모르는 내게, 바지를 내리고 일을 보며 물을 내릴 때 물이 솟는 모양을 흉내내는 카쥬나, 본래 캐릭터가 그런가, 비교대상이 드물 정도로 귀엽다. 그에 비하면 메이는 다소 세침한 편, 어쩌면 영어가 짧아서 그런지도 모르는 생각이 든 건, 나름으로 열심히 전자사전을 뒤져가며 대화를 거들었기 때문. 기특한 데다가 성의가 있는 아이임이 분명하다.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지칭하 듯 지구촌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이 21세기 개명천지. 조선의 사나이를 자청하는 나,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제국주의의 패악으로 얼룩진 과거를 말끔히 청산하고 범 아시아권의 화합과 신 질서를 위해 이 한 몸 과감히 투신하여도 좋겠다 싶으리만치, 메이와 카쥬나는 일본에 대한 호감을 무럭 무럭 심어주고 있었다. 귀여운 것들(물론 아무리 그래도 독도는 우리 땅이다).
석양이 온전히 몸을 뉘이고, 점차 크리스 마스의 열기가 데워지듯, 여기저기 부비부비하며 소리치는 음악들. 식사는 예상보다 훨씬 즐거웠고 취기는 이제 막 스타트를 끝은 듯 활개를 치고 있으니, 자, 이제 음악이 있는 곳으로 나서 볼까, 하며 득달같이 계산을 마쳤다.대략 2000루피 였을 게다. 물론 몇푼의 잔 돈을 팁으로 두루두루 돌리고(여행을 하며 팁과 박시시 인심은 누구 못잖케 후 하게 썻다. 그런 나를 빌어, 그 인심은 모조리 바가지와 도둑질로 이어진다고도 하였으나, 나는 그런 거시적인 안목을 지닌 인물이 못 된다. 그들의 한 달 봉급을 상회하는 술을 마시고 있기가 미안햇고, 헐 벗은 어린 천사들을 외면할 만치 마음이 강하지도 못했기 때문. 그 금액은 어린 인도 배낭 여행자들의 한 달 경비라면 옳을 게다. 일 평생 가난한 내가 이런 호사 한 번 누렸다. 하하하).
달뜬 취기로 무장하고 흐느적거리며 음악이 점차 시끄러워지는 지점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사이 흥취 도도했다. 두 소녀를 대동하고 무엇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한 나를 보고 '플레이 보이'라고 외치던 어느 꼬마의 손가락질 마져 달게 느껴지고.
이제는 내 구역처럼 느껴지는 레스토랑 씨 호스. 며칠을 주야장천 너나 없이 마시고 어울린 덕으로 쉬이 친해졌거나, 친해진 척하는 친구들 몇몇과 크리스 마스 인사를 나눴다. '하이 진, 어디 갔었어?' 알아서 뭐 하게? 라는 시크함이 아니라 웃음으로 화답했다. 편안하여 좋아하는 좌식 테이블에 둘러 앉아 다시 맥주 몇을 주문하고 빠짐 없이 간빠이!. 전에 없던 경쾌한 음악에 한 숨 쉬어가자던 흥취와 취기는 다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오빠~ 달려!
그리고 그 놈의 공습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