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진보
이른 아침 둘째를 학교까지 바래다준다.
항시 밤 늦게 잠드는 나로선 여간 고역스런 일이 아니건만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된 일린의 울음병에 나가떨어진
아내를 대신해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눈물의 등굣길이 벌써 3 년째.
남의 자식들은 어린 것들이 씩씩하게 혼자서 잘도 가건만
미욱한 우리 딸은 아비의 살뜰한 배행을 받고서도
교실 들어가는 신발장 앞에서 늘 눈물 바람이다.
평강왕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무수히 얼러도 보고 달래도 봤다.
허나 당근과 채찍이 별무소용인 울보공주 앞에선
그 어떤 사탕발림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매일 아침 구깃구깃 구겨지는 일린이의 마음을
쫙쫙 펼 수 있는 요술 다리미는 진정 없는 것일까?
우는 아이를 교실에 밀어넣고 돌아서며 마음의 진보를 생각한다.
육신이 자라는 만큼 마음 또한 자랄 수 있다면.
앞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마냥 우리네 정신도 나아갈 수 있다면.
물질의 진보, 기술의 진보, 구조의 진보.
다 좋은 말들이다.
허나 마음의 진보가 없는 진보(進步)가 진보(珍寶)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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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쓴 글이다.
징글징글하게 이어진 일린의 울음병은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불어 올 무렵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보다 못한 찬흠이가 총대를 메고 동생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엄마 아빠도 못한 일을 세살 위 오빠가 어찌 해내랴 싶었는데, 세상일이 참 신통하다.
오빠의 손에 억지로 끌려 나선 뒤로 일린의 울음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할렐루야다!
로또 숫자 여섯 개 맞추는 게 어찌 기적일 수 있으랴.
평강공주의 울음을 멈추는 것, 이런 게 진짜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