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의 유아독존 <무릎팍 도사>에서 마음이 아픈 아들 이야기를 꺼낸 김태원의 고백이 화제다. 하지만 내게 놀라움으로 다가든 그의 말은 따로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에게 심하게 얻어 맞고 학교를 겉돌게 된 이후 중학 시절 기타를 만나 구원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난 다음 그는 이리 말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소외와 차별의 아픔을 겪은 나는 지금도 나와 같은 상처를 지닌 친구들의 모습이 절로 눈에 들어옵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절대 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저 아이야말로 과거의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의 시선도 머물지 못하는 곳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이 바로 나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체로 이런 맥락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귀가 활짝 열렸다. 저이가 지금 부처의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석가모니의 탄생게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釋迦牟尼佛初生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曰 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모니 부처께서 처음 나셨을 때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일곱 발짝을 걷고 나서 사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하늘 땅 위에 나보다 존귀한 이가 없다." 오늘날 '유아독존'이라 한 석가의 말은 독단과 교만의 대명사로 쓰인다. 모르긴 몰라도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제 맘대로 늘리고 자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화신들조차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기꺼이 사양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유아독존의 원의(原意)는 그런 부정적인 의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석가가 이 세상 어디에도 나밖에 없다고 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곧 나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의 슬픔이 내 슬픔이고 모든 중생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뜻이다. 나와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나와 타자의 경계가 무화된 경지가 바로 유아독존인 것이다. 나는 김태원의 말을 들으며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의 일절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을 자기화할 줄 아는 김태원의 마음은 진정 아름답고 따스하다. 그가 <위대한 탄생>에서 다른 멘토들이 거들떠보지 않은 무녀리들을 기꺼이 껴안았던 것이나 미사리의 늪에서 야수의 본성을 잃고 처진 어깨로 벌이의 노래를 부르던 박완규에게 손을 내민 것은 얄따란 그의 체구 속에 호연한 마음의 바다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자신의 지극한 고독과 슬픔을 사랑과 예술의 자양으로 전변시킨 우리 시대의 사차원 보살 김태원. 병약한 그의 무병과 장수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리고 그가 꿈에서조차 그리던 아들과의 대화도 머지 않은 날에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자투리
2011-04-01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