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140자 트윗에 길들여진 당신, 스크롤을 삼가시라. 정력 낭비 시간 낭비 눈 버리고 마음 상하신다. ---------------------------------------------------------------------------------------------------------------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청준의 <눈길>이란 작품이 있다. 고등학교 때 가계가 파산한 이후 자수성가한 아들이 여름 휴가에 아내와 함께 시골의 어미를 찾는다. 때는 바야흐로 지붕개량 사업이 한창이던 시절, 어미는 단칸 오두막을 고치고 싶은 속내를 은연 중에 비치지만 몰풍스런 아들놈은 그런 어미의 바람을 나몰라라 한다. 나 혼자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고 대학 나와 취직하고 어려운 살림을 꾸리는 동안 노인네가 내게 해준 게 뭐냐? 협량한 아들은 어미에게 받은 것이 없음을 기억하며 연신 마음의 도리질을 해댄다. 하지만 몰인정한 아들의 마음 한 구석에도 어미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다. 엽렵한 아내는 그런 마음을 알아채고 시어미에게 자꾸만 옛날 얘기를 채근한다.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17,8년 전 눈길의 추억을 말이다. 형의 주벽으로 파산한 이후 팔려버린 집에서 어미는 한 달을 넘게 빈집을 쓸고 닦으며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아들을 기다려 밥을 지어 먹이고 옛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로한다. 그리고 눈길의 새벽녘 어미는 아들의 가는 길을 면소까지 따라와 배웅한다. 어미는 아들을 떠나 보낸 뒤 돌아갈 정처가 없는 마을로 돌아오며 하염없는 눈물을 쏟는다.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어미의 담담하고 나직한 독백을 듣고 나서야 아들은 제 마음의 묵은 빚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오르는 그 무엇을 느끼며 회한의 감정에 젖는 것이다. 뜬금없는 소설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김대중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김대중을 또 그의 유산을 제대로 '알려는' 이가 많지 않다. 답답이 보수에게 김대중은 여전히 빨갱이고 좌파정권 10년의 출발점이며 지역감정의 뿌리다. 한마디로 현존하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국립묘지를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제 고향 '절라도'에 김일성이를 닮은 '절라' 큰 동상까지 세우지 않았던가. 하는 짓을 보면 김대중은 죽어서도 영락없는 빨갱이다. 윤똑똑이 진보에게 김대중은 3김이고 노욕의 화신이며 구태 정치의 표본이자 신자유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원수다. 한마디로 후지다. 자식 하나 단도리 못한 사람이 그 비싼 자서전에 제 자랑만 엄청스레 늘어놨다더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김대중은 역시 후지다. 1985년 <김대중 옥중서신>의 감동으로 만났던 그가 2년 후 '비판적 지지'의 노란 물결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지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을 있는 대로 해댔다. 92년에 '떨거지'들을 그러모아 또다시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의 '노추(老醜)'에 연민의 감정까지 느꼈다. 정치적으로 죽었던 그가 97년에 좀비마냥 다시 일어섰을 때 나는 세간의 말대로 저이의 병은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대통령병이 맞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러던 내가 생각을 달리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새천년의 이른 봄 김대중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설과 대담을 갖는다. 늦은 밤 나는 라면 냄비에 코 박고 TV로 생중계되는 연설과 대담을 지켜봤다. 연설도 연설이지만 이후 진행된 학생들과의 대담에서 늙은 대통령은 탁월한 논리와 유머로 청중을 설득하고 있었다. 악의적인 비토 그룹에 의해 민족의 기본 모순인 분단 극복을 향한 그이의 첫걸음이 노벨상 프로젝트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그날의 그는 15년 전 내가 만났던 그 사람 그대로였다. 입에 발린 정치적 수사가 아닌 진실한 말의 힘을 믿는 사람. 좀체로 조화되기 어려운 서생적 문제 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함께 갖춘 이. 그 사람이 김대중이었다. 잡설의 마지막에 잡설 하나만 첨언하련다. 우리 이제 한두 마디의 말로 남을 쉽게 규정하는 태도는 삼가도록 하자. 김대중은 3김으로 묶일 수 없다. 사자(死者)를 욕보이는 그런 말은 제발 그만 좀 하자. 김대중의 경제를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라 못 박지 말자. 그러는 거 아니다. 비록 플라톤이 말한 공화국의 철인까지는 아니지만 김대중은 우리가 만난 가장 괜찮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말자. 누구나 유산을 남긴다. 공수래공수거라지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이는 결코 없다. 내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내가 주고 갈 수 있는 것 또한 많지 않은 법이다.
자투리
2011-03-25 1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