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있습니까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 석 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의 전집을 차례로 읽어가던 십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이 시를 만났다. 책을 잃어버려 정확하진 않지만 <수평선 너머>라는 시집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말이 있듯 그 시절의 나는 자별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십대와 이십대의 청청한 시절을 그들과 함께 뒹굴며 울고 또 웃었다. 허나 속절없는 세월이 흐르고 난 마흔둘의 지금 영혼을 소통하는 벗이라 여겼던 그들 중 연락이 닿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다. 살다보면 놓아버린 건지 놓쳐버린 건지 구별이 안 되는 게 있다. 그들과의 만남 역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궂긴 인연에 아쉬움의 마음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스러져가는 만물의 이치를 생각하면 그건 서러운 일도 절통할 일만도 아니다. 지금은 레이소다에 계시잖는 솔이울 님이 언젠가 '상우천고商友千古'의 뜻을 물어오신 일이 있었다. 연암의 <회성원집발>에 나오는 양웅의 태현경 이야기로 답을 드렸다. 아득한 옛사람이나 자신을 알아줄 천고 뒤의 사람으로 벗을 삼는다는. 양웅의 말처럼 지기를 찾는 일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법이다. 연암은 이 글에서 벗을 '제 2의 나'라고 칭했다. 그는 벗을 '내 마음의 눈과 귀가 되고 손발이 되어줄' 이라 여겼는데 과시 옳은 이야기다. 이같은 연암의 말은 위 시의 마지막 구절과도 통하는 것이다. 온세상의 찬성보다 벗의 한 마디를 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하여 알뜰하고 간교한 세상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게 만드는 책선(責善)의 벗이야말로 우리가 만나야 할 참벗이 아니겠는가. 논어 학이편 일장 이절의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의 뜻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學而時習을 통해 제소리를 갖게 된 이의 '참말'은 자연스레 도반(道伴)을 불러 모으게 된다. 오곡산의 무이정사에 고요히 앉은 주회암을 찾아온 이들이 바로 '원방(遠方)으로부터 온 벗'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원방은 지리상의 거리가 아닌 현실의 장벽을 무릅쓰는 용기이다. 간신이며 권신이었던 당대의 세력가 한탁주의 눈엣가시라 할 주희의 도반이 되겠다는 것은 의당 명리와 출세를 스스로 내던지는 행위였다. 덕산에 엎디어 있던 처사 조남명의 고고탁절을 흠모하며 그를 찾아 배움을 청한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고는 하나 평생 출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조정으로부터 늘 경원시되었던 그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결기 이상의 비상한 의지가 필요했으리라. 요즘 사람들은 친구 대신 '지인'이란 말을 즐겨 쓰는 듯싶다. 호구를 알고 애경사에 참석하고 부조를 보낼 정도면 지인이다. 허나 지인(知人)은 지기(知己)가 아니다. 그가 나를 깨우치고 내가 그를 일으키며, 샛길로 빠진 나를 바른 길 가게 하고 구렁에 발디미는 그를 향해 아낌없이 질책할 수 있어야 온전한 지기다. 마주 향한 철로의 평행선마냥 참을 향해 나란히 한길을 가는 이가 벗이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고리끼가 톨스토이를 바라보며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 사람이 여기 살고 있는 한 나는 지구의 고아가 아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벗. 당신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2006년 여름 초입, 이빨 빠진 갈가지 삼총사 그리고 일린 엄은상(7)+유일린(4)+박재성(7)+유찬흠(7)
자투리
2009-06-19 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