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왜 하십니까
"여러분, 공부 왜 하십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학생들의 표정이 뜨악하다.
금요일 오전, 매주 자원봉사를 나가는 평택시민아카데미의 대입 검정고시반.
중학교 검정고시반에서 올라온 사오십대의 아주머니 서너 분과
고등학교를 자퇴한 십대 후반의 아이들 일여덟이 앉아 있다.
선뜻 대답들을 못하다가 어렵사리 한 아이가 입을 연다.
"대학 가려고요."
"가서는요?"
"전공 공부 하려고요."
"해서는요?"
"취직해야지요."
"그럼 공부는 거기서 끝인가요?
결국 공부는 먹고 살기 위한 거라는 결론이네요."
칠판에 '工夫'를 썼다
"공부는요, 하늘의 뜻과 땅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알기 위해 하는 겁니다."
학생들을 보니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는 표정들이다.
'工'자와 '夫' 자는 같은 말이다.
'공'과 '부'의 위 아래 두 개의 'ㅡ'자는 각각 하늘과 땅을 의미하고
그 둘을 연결하는 'ㅣ , 人'은 사람을 뜻한다.
공부와 같은 의미를 갖는 글자가 어질 인(仁)이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뜻(理)과
온갖 물상들이 발현하는 힘의 작용인 땅의 이치(氣)를
바로 아는 자가 인자요 군자다.
허나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인자가 또 군자가 되어 보겠다는 씩씩한 이 하나 없고
그런 이들을 길러보겠다는 꿋꿋한 이도 쉬이 보이지 않는다.
원의(原義)를 망실한 공부는 기껏 생활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방편적 공부에 매달리는 아이들은 공부를 마치 원수처럼 여긴다.
논어 첫머리에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한 말이 온통 무색하기만 한 세상이다.
어쩌다 이리 된 것일까?
문제의 근원에는 공부를 '한때의 것'으로 치부하는 잘못된 풍토가 자리하고 있다.
초중고의 엄혹한 입시경쟁을 뚫고 서열화된 대학의 피라미드에 올라
안정적인 직장을 확보하는 것에서 우리 시대의 공부는 그 소임을 다하고 만다.
고등학교 정문마다 또 대학캠퍼스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입시 결과와 고시 합격의 플래카드들은
우리 시대의 공부가 지향하는 가치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 잘난 현수막들은 공교육의 부재,
참 공부의 부재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사람은 기식(氣息)하는 동안 공부를 쉬면 안 된다.
숨이 끊어지면 생명 또한 끊어지듯
공부는 나와 세계와 진리를 이어주는 참생명의 끈으로 한순간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참을 찾기 위한 공부가 아닌 밥을 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닐 뿐더러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느님의 올바른 관계를 망각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정치 사회적 난제들과
삶의 지향을 찾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버린 개인들의 좌절은
우리가 내던져 버린 진짜 공부의 필요성을 반증하는 표징이다.
열 살의 찬흠이 엄마의 엄중한 감시 하에 공부를 하고 있다.
셔터를 누르고 아이에게 묻는다.
"찬흠아, 공부 왜 하니?"
"보고도 몰라? 아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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