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위험(危險) [명사]해로움이나 손실이 생길 우려가 있음. 또는 그런 상태. 사진은 전봇대를 찍은 것이다. 감전의 위험이 있기에 써 붙여 놓은 경고문일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주위에는 위험한 것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험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전봇대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술 취한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 깡패, 강도 미친개 독극물 칼 부탄가스 이명박 이들은 모두 눈에 보이기에 피해가거나, 조심히 다루게 된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기에 위협을 느끼지도, 피할 수도, 대처를 할 수도 없다.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사실은 이런 것들이 우리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인간에게는 살고자하는 의지가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자하는 의지도 있다. 쉽게 말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꿈이 존재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국에 그 꿈을 저버리고, 편하게 살 수 있는, 돈을 많이 버는 길을 택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든 주변사람들, 특히 부모에 의한 것이든, 우리는 그렇게 힘들고도 쉽게 변해간다. 예술가가 되겠다는 자식새끼에게 밥 먹다 말고 숟가락 내던지는 부모의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이제는 너무나 따분한 소재이다. 이는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일 뿐, 이 외에 더 많은 형태로 우리들의 인생을 뒤틀어 버린다. 도대체가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환장할 것 같다. 불합리한 사회는 위험하지 않은 것을 위험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쉽게 비유를 해보자. 낭떠러지는 피해가게 되어 있다. 떨어지는 일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안전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일은 위험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예술가하는 것은 부모님께 숟가락으로 맞게 되는 위험한 일이 된다. 헌데, 돈을 많이 버는 일과,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일이 원래 정해져 있던가? “당신들은 의사고, 변호사니까 연봉 1억은 당연히 넘어야 하고, 니네는 편의점 알바니까 시급 3000원 받던가, 싫으면 하겠단 사람 많으니깐 딴 데 알아보던가.” 정당한 노력과 시간투자에 따른 임금의 차등지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위 88만원세대가 88만원을 받는 것이 정당하냐는 것이다. 반대로 불합리한 사회는 위험한 것을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신분차별이 존재했던 과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탄은 하면서도 신분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순응하며 살았다. 그 시대 사람들 많은 수가 위험한 것을 인식조차 못하며 살아왔다. 과정은 불행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현대사회는 법적으로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법문화하게 되었다. 헌법 제2장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2항.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똥 묻은 휴지 쪼가리다. 평등하다는 말엔 기회의 평등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회가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평등하지 않다면 우리는 알고 있기나 한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투자에는 노력과 자본이 있다. 노력은 개개인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 우리가 평등을 논함에 있어서 생각해야 할 투자란 곧 자본을 의미하게 된다. 결국 자본이 기회를 생산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기회의 평등을 논하기 위해서는 소득분배의 평등함을 따져 보아야 한다. 우리를, 우리네 부모님을 바라보자. 자식 교육비에, 생활비에, 세금 떼고, 연금 떼고, 이거 떼고, 저거 떼고 나니 허리 조르고 살 수 밖에 없다. 언제나 헉헉대고 산다. 하루 8시간씩 5일 근무로 주 40시간, 바쁘면 야근에, 주말까지 나가서 쌔가 빠져라 일하는데, 늘 이 모양이다. 반면에 기업들은 살쪄간다. 그것도 대기업만 살쪄간다. 헉헉대긴 대기업 횡포 속에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난 이렇게 죽도록 일하는데, 그로 인해 창출되는 부의 가치는 아스팔트 위에 쥐똥 붙었다가 떨어진 자국만큼 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충분한 부를 창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늘 아스팔트 위 쥐똥 붙었다 떨어진 자국 긁어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 소득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저어기 저 위 높으신 분들께서 주말에 퍼팅 한 번 더 하기위해, 마누라 밍크코트 입혀주기 위해 자기네 허리는 조르지 않고 남에 허리를 조르고 있다. 우리의 허리를 조르고 있다. 애초부터 우리의 허리는 늘 졸려왔기에 졸리는 줄도 모르고 마치 과거에 조상들이 신분제도를 당연히 여겼던 것처럼 헉헉대고 사는 것을 당연시 하고 살아왔다. 쥐꼬리 월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원래 이 바닥이 그래. 좀 많이 짜. 힘들기만 하고 이건 뭐, 완전 3D야.” 원래 짠 바닥은 염전 바닥이고,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원래라는 것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살고 있다. 간단히 말해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다. 우리는 위험한 것을 위험한 것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더욱 더 문제인 것은 이러한 사회 시스템이 자본에 의해 형성된 계급을 더욱 더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기회도 적어지고, 결국 계급상승의 꿈도 멀어져만 간다. 있는 사람은 계속 있고, 없는 사람은 계속 없게 된다. 극히 단편적으로 말하여 전문대학원이 도입된 이 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의사, 변호사가 되기가 더욱 더 어려워졌다. 그것도 부족해 국제중학교같은 비평준화 학교를 만들어 제도적으로 2중, 3중 방어막을 친다. 물론 전태일이 몸에 휘발유 뿌리고 불붙이던 시절보다는 좋아졌다. 하지만 우리의 허리를 조르고 있던 허리띠 구멍 한두 개 느슨하게 풀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피토하며 미싱질하고 있다. 과연 몇 명의 전태일이 더 나와야 바뀔 수 있는가? 가뜩이나 한 번 오르면 내릴 줄 모르는 기름값때문에 죽겠는데, 얼마나 더 많은 휘발유와 성냥이 필요한가? 답답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자식들도 결국엔 피토하는 목구멍 틀어막으며 미싱질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직접 칼을 들고 우리의 자식들에게 겨누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 위험한 존재는 바뀔 의지가 없는 우리 자신이다.
a piece of peace
2009-02-06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