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 47
편지 . 30
현주야,
이사 온 집에 살아 보니, 좋은 게 많다. 아침에 일어나 개울에서 세수하는 것,
세수하고 나서 뒷산에 올라가는 것이다. 요사이는 안개가 끼고 그리고 해가
뜨면 그 안개 사이로 나타나는 산국화꽃이 너무 아름답다. 연보라의 쓸쓸한
빛깔이 후미진 골짜기 기슭으로 무덕무덕 피어 있는 모습은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억쇠풀 사이에 피어나는 분홍빛의 패랭이도 귀엽다.
좀더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라지와 과남풀, 초롱꽃이 있다. 가을 꽃은 여느 꽃도
한결같이 작고 섬세하다.
야단스럽게 피었다가 덧없이 져버리는 봄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구나.
조심스럽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피어나서 또한 아주 천천히 시들어가는 것이
가을 꽃이다.
그늘에서, 그리고 조용히, 다소곳이 누구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이가 과연
찿아왔는지, 그들은 감정을 억누르며 울음을 삼키는 금수강산의 넋들이다.
이사 온 집의 저녁 시간이 더 좋다.
어둠이 깔리면서 사방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황홀하다. 열마리, 스무마리, 그리고
더 많이 빌배산 머리 둘레로 개울쪽 과수원 울타리 너머로 한없이 날아다닌다.
혼자 있는 것이 이렇게 포근하고 아늑한 건 요즘 와서 처음 느낀다. 조용히
앉았거나 누워 있으면 행여나 깨뜨려질까봐 꼼짝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롭다.
좀 비겁한 자세이지만, 가난하다는 것, 외롭다는 것은 이렇게 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귀뚜라미는 낮에 본 산국화의 그 연보라 빛깔처럼 여리게 운다. 이래서 그런지
우리 집 꾸구리(개)도 영 짖지를 않는다. 우리 집 꾸구리 눈빛깔이 너무 예쁘다.
강아지 주제에 항시 눈동자가 젖어 있는 듯 애처롭게 하늘을 쳐다 본단다.
여섯 달 전에 장에서 사올 때, 제일 작고 빼빼마른 걸 골랐던 것이 너무 무던하고
착해서 오히려 걱정이다. 처음엔 강아지 사려고 생각지도 않았는 데 꾸구리 보는
순간 가엾어서 사온 것이란다.
꾸구리는 된장에 비빈 밥을 제일 잘 먹는다. 싱싱한 무우잎과 배추잎도 잘 먹는다.
현주야, 나는 언제 어른이 되려는지 아직도 만날 슬프고 아름다운 게 좋구나.
오늘 편지 꼭 연애편지 같이 씌여졌구나.
4316.10.5
正生
--- 권쟁생의 글모음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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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 하리 입구 점방의 누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