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이었다. 매일 서너 시간 이상 눈을 붙일 수 없는 강행군이 열흘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다 끝났다. 일행들을 떠나보내고 나 혼자 남았다. 이제부터 일주일은 자유, 그것도 완전무결한 자유다. 해안선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며 낯선 나라의 내밀한 표정들을 훔쳐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출을 찍고 싶어 며칠을 벼르다가 호텔 모닝콜 덕분에 간신히 눈을 떴다. 호주의 5월 말은 한국의 늦가을 날씨와 비슷했지만, 그날 새벽은 기온이 뚝 떨어진 데다 강풍이 불고 파도가 드높았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입었는데도 손이 시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느릿느릿 해가 떠오른 후, 파도타기에 열중한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퍼들을 찍다가 문득 그들과 내 렌즈 사이에서 자꾸 얼쩡거리는 물체를 발견했다. 포토그래퍼였다. 그는 얼음장 같은 물 속에 맨발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따금씩 이리저리 걸음을 옮겼고, 가끔은 무릎을 꿇었고, 카메라 LCD를 들여다보며 혼자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 파도가 밀려오고 물보라가 흩날리면 카메라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아침 햇살이 그의 상반신을 쓰다듬었고 거친 파도가 하반신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어느새 나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해변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옷은 가슴팍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면서 바람보다 파도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You crazy son-of-a-BITCH!!! You were AWESOME!!!" 그 역시 껄껄 웃으며 사진 찍기 좋은 날이라고 목청껏 외쳤다. 둘 다 아드레날린의 폭주로 미치광이처럼 흥분한 상태였다. 우리는 카메라를 바꿔 들고 서로의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베니의 카메라 속에는 파도가 만들어낸 거대한 터널과 함께 서퍼들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서로 축하해주었고,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고, 다시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아쉽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왠지 바닷바람이 그리 차갑지 않았다.
깊은발목
2008-06-18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