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스키드로우가 아이리멤버유를 부르기 시작할 때쯤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그 노래에 심취하여 지난 한 순간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떠올린 과거 기억의 배경은 오류동의 한 낡은 옥탑이다. 아니 나는 옥탑이 보이는 골목에 서서 지금은 아내가 되어 있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시종일관 밝은 얼굴로 살아가는 그녀는 또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위축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그 마음속에 작은 빛이라도 되어주고 싶었던 나는 세상 밖에서 염탐하듯 살아가는 그녀를 좀처럼 쉽게 그 작고 허름한 옥탑으로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비좁은 철제사다리를 통하여 그녀의 보금자리인 참담한 옥탑으로 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밑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스커트 밑으로 뻗은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비스챤 바흐는 정말 처절하게 아이리멤버유를 외치고 있었고 아마 세바스챤 바흐의 여자도 나의 경우가 그러하듯 매우 아름다울 것 같았다. 날카로운 메탈사운드가 귓전에서 계속 맴돌았다. 노래의 중간부분에서 터져버릴 듯이 뿜어져 나오는 것은 음악이라기보다 차라리 울부짖음이었다. 스키드로우가 아이리멤버유를 부르고 있다. 그때 나는 나의 추억을 작은 공간 속으로 꺼내놓았다. 세바스챤 바흐는 나의 과거를 노래 부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의 미래를 노래하였으며 나의 일상과 세상을 규정하고 있었다. 옥탑으로 올라 간 그녀는 까마득한 골목에 서있는 나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야.
여기가 나의 공간이야.
여기서 나는 내 맘대로야.
자유로운 나만의 세상이야.
그녀는 눈부신 모습으로 나를 보며 두 팔을 하늘로 뻗어 제자리에서 어지럽도록 돌고 또 돌았다. 내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마치 깃발처럼 작은 그녀의 하얗고 투명한 스커트가 바람에 펄럭거리는 모습이었으며 눈물겨운 그녀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그녀와 함께 그야말로 가장 편안한 곳까지 와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세상을 벗어나 볼품없는 그녀의 보금자리에서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깃발을 바라보았다.
이미 십년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