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의 웃음
사랑하는 아버지가 황망스레 우리 곁을 떠나신 뒤
저희 가족은 해마다 현충일이면 청양에 있는 선영과
아버지 무덤을 찾습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이 많으셨던 아버지.
칭얼거리는 삼남매 차례로 포대기 둘러 저녁마다 마을을 몇 바퀴나 도셨던
그래서 사람들한테 포대기 유씨라고 놀림 아닌 놀림 받던 우리 아버지.
자식 사랑도 자식 사랑이지만 엄마에게
"난 애들도 좋지만 뭐니뭐니해도 당신이 제일이여!" 하고
사랑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던 우리 아버지.
시골에선 농사꾼으로 도시에 와선 노동자로 뼛골 빠져가며
자식 삼남매 대학에 대학원 공부까지 시킨 우리 아버지.
그러면서도 '나 힘들다' 한 마디 안 하시고
늘 "나처럼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읎어"하셨던 우리 아버지.
월부로 구입한 새 오토바이 타고 오셔서
우리 남매 앞뒤에 태우고 신나 하시다가
집에 돌아 오신 어머니 한 말씀에 오토바이 갖다 주고
당신의 삐그덕거리는 낡은 자전거 다시 타고 오신 우리 아버지.
그 자전거로 십릿길 삼남매 통학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태워주셨던,
비포장 높은 고갯길도 단걸음에 올라채신 힘센 우리 아버지.
책 좋아하는 아들 위해 쌀 한 섬 값도 넘었던 50권짜리
<계몽사 소년소녀 문학전집>을 사다주신 통큰 우리 아버지.
매일 저녁 6시면 당신 입으로 땡소리 내며 현관문을 들어서시곤
환한 얼굴로 '아빠 왔다'하시던 우리 아버지.
그날도 그렇게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돌아오시는 분이었으니까요.
허나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던 제재소에서 작업 중 추락하셔서
뇌수술을 받으신 일주일 뒤 중환자실에서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만 받았습니다.
회초리 한 대 맞은 적도, 큰소리 한번 들은 적도 없습니다.
사랑만 받았습니다.
아무 것도 돌려 드리지 못했습니다.
살아만 계신다면 이제 사람 구실하고 사는 이 큰아들이
당신이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좋은 오토바이도 사 드리고 맛난 것도 대접하련만.
아버지 돌아가신 뒤 당신의 유택에서 우리 가족은 늘 울었습니다.
어머니 목 놓아 우시고
한 살 위 누나는 소리없이 울고
저와 동생은 속으로만 울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던가요.
8년째 되는 햇살 좋던 작년엔 다들 울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맛나게 쪄간 쑥개떡 나눠먹으며 아버지 흉도 보고
그 위에 모셔진 큰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하며 흥겹게 지냈습니다.
8년만에 웃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웃음도 우리 아버지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