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연기 속의 마샤
..
그리고 마샤.
그리고,
침묵과 연기 속의 마샤.
메드베젠꼬 _ 마샤, 그 옷 좀 벗을 수 없어요? 왜 늘 그런 검은 옷이냔 말이에요.
마샤 _ 내 인생에 대한 상복이에요. 내 인생은 죽어있거든요.
내 인생은 죽었거든요. 혹은, 내 인생은 죽어있거든요.
마샤의 그 첫 대사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죽었다.
죽었고,
죽어버렸는데,
죽은 채로 그냥 있다.
그냥.
죽은 채로 나는 여기에 있어요.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예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우리는 어떤가? 이다. 그때 내게 던져지는 질문이다. 나는 어떤가? 살아있는가?
나는 내 인생에 관계해서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있지? 다.
빨간색인가. 파란색인가. 젊은가? 늙어, 늙어버렸는가? 살아있나? 죽었나? 다.
언뜻 보기에, 마샤는 안톤 체홉 자신이다.
그의 젊은 시절이다.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그저 살기 위해 글을 쓰던 작가 자신이다.
존재하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한다. 먹는다. 마시고 소화시킨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쓴다. 노력, 한다. 피로에, 쌓인다. 우리는 우리가, 되어, 간다.
세자매에 이어, 참으로 황홀할 지경이다. 좋아도 너무 좋다.
세자매. 갈매기. 그 다음은 뭘까?
나는 체홉의 작품이 좋아서 죽을 지경이다.
얇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고 씹으면 씹을 수록 맛이 새롭기 때문이다.
연극 [갈매기]속에서의 마샤가 나는 애처로와 죽겠는데
이럴 때가 아니구나. 나를 쳐다봐야하니까.
지금의 나를.
우리를.
그저 존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우리를. 그리고!
나를. 나를. 나를. 나를. 나를.
나는 아직도, 아마도 먼 훗날에도
워크샵 갈매기의 사진들을 쳐다보게 될 것이다.
뜨례블례프가 죽어있을 때,
마샤는 아무말도 없다. 침묵이다.
애초에 죽어있었으니 말할 수도 없다는 듯이.
드디어 관객들이 말 할 차례인데 글쎄다.
관객들의 시선은 저마다의 시끌벅쩍한 표정들에 꽂히거나 아니면
꾸부정하게 쓰러진 꼬스챠에게 던져질 것이다.
그래서 연출은 마샤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피워. 피워. 제발 피워.
제발 담배 좀 그만 피워! 할 정도로 무진장 담배를 피워.
아니면, 빨어빨어빨어!!! 했을 것이다.
빨아도 곧이어 내뱉게 될 연기를 마셨다가 내뱉는 마샤.
침묵과 연기 속의 마샤.
나는 거기에서 비로소 눈물이 난다.
담배란, 아니 담배연기란, 가난한 자들에게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가난하거나, 물질에서 가난하거나.
다시 읽어보니, 마샤의 1막 마지막 장면도 참 좋구나.
마샤. 그저 운다.
마샤는 그저 울고 말았다.
사람은 누구나 우울할 때가 있는 거라고 말할 줄 아는 마샤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결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 깊이 감동해 마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힘든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2008 03 03 0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