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華僑) 한국에 화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고종 19)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광둥성 수사제독(水師提督) 우창칭[吳長慶] 휘하 군대를 따라 40여 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청나라는 동년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 즉 통상조약을 강요하여 화교유입의 길을 터놓았다.이에 따라 1883년에는 서울·인천·부산 등 주요도시에 이미 210명의 상인과 111명의 관리가 주재하였고, 1884년에는 서울 30명·인천 235명 등 화교수가 급증하였다. 이어 1884년 인천, 1887년 부산, 1889년 원산에 화상조계지(華商租界地)가 설치됨에 따라 화교수는 인천에만도 1,000명을 넘어섰다.그리하여 이들은 상업을 천시하던 조선조의 상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는데, 1923년 조선총독부 통계는 서울·인천의 화교 6,000명이 그간 본국에 송금한 액수를 당시의 일화 1000만 엔(현재의 100억 엔 상당)으로 줄잡고 있음으로 보아 그들의 이익이 막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자료:1983년 중화민국 한국 연구학회 간행 《여한 60년 견문록(旅韓 60年 見聞錄)》 중 〈한국화교사화〉). 또 한국 화교의 특징으로는 그들의 90% 정도가 산둥성[山東省] 출신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큰 이유는 1898년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둥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피난지로서 한국을 택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 해 돛[solar sail]
2008-01-23 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