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苦惱) 벼랑끝 조정권 그대를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을 찾아갔더니, 때아닌 간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 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벼랑끝만 느꼈습니다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귀로에 놓인다.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외쪽으로 갈 것인가. 얼마전 등산로에서 나는 여러번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 중간 중간에 이정표가 없는 두 갈래의 길이 많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상에 오르는 길에 난 갈림길은 결국 산꼭대기로 통하는 길이었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정상에 오를 수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다시말해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 갈림길에서 나는 크고 넓은 길을 택했다. 규모가 비슷한 길에서는 경사가 더 급한 곳을 택했다. 정상을 향한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당연히 그러한 선택을 했다. 정상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산의 능선을 따라 종주를 하겠다는 두 번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지없이 능선을 따라 걷는 길에도 안내 문구가 없는 갈림길이 많았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이번에도 경사가 더 급하고 넓은 길을 골랐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행보가 점점 산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길을 잘못든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나는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암자에 도착했다. 스님은 나에게 합장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를 따라 인사를 했다. 산을 종주하려던 나의 계획을 설명했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 못 든것 같다고 스님에게 얘기를 건냈다. 스님은 부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인연이라 말씀하셨다. "인연"이라는 단어에 흥미를 느끼고는, 객사 툇마루에 앉아 사찰에 온김에 차라도 한 잔 얻어마실 요량으로 스님에게 합장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스님은 흩어지 마음을 모으는 의미라고 간단하게 설명을 하시고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주었다. - 보수적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나는 과거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비교종교학 서적을 몇 권 읽었던 터라 불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흥미로웠다. - 스님과의 짧은 담소를 마치고 인연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담고 그저 길을 걸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늘 산의 능선을 따라 걸으려했던 나의 바램이 이루어지기에는 뭔가 부족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길을 걸었다. 산에 난 길을 따라 그냥 걸었다. 1시간여를 걷다보니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나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여러 번 선택의 갈림길을 마주했다. 우리는 오른쪽과 왼쪽의 선택 뿐만이 아니라 올라갈 것인지 내려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그 동안 나는 오르기를 부단히도 선택해왔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내 마음 속 깊은 뿌리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 세미한 음성을 말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선택한 길이 올라가는 계단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때는 올라가는 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내림길이 아니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싹터올랐다.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과연 나에게 오름과 내림 혹은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선택권 자체가 주어졌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마저 일게 했다. 어쩌면 나는 벼랑끝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서있기만 했던 것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마치 위 아래가 뒤집혀진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오를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계단의 반영을 나는 현실이라 믿어왔던 것이 아닐까?
Rainer Maria Rilke
2007-09-03 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