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놀이
급행열차 찬흠이는 세 살 적에 이미 거뜬했건만
완행열차 일린이는 다섯 살에도 버겁다.
말놀이-설화(舌禍) 혹은 설화(屑話)
권신 윤원형이 누이인 대비-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천하의 권세를 쥐락펴락하고 있을 때,
영남의 산골 처사 조남명이 명종에게 사직의 소를 올렸다.
흔히 단성소라 불리는 이 상소문에서 조식은 대비를 과부로, 임금을 고아라 지칭하며
당대의 실정을 신랄하게 통박하였다.
<전하의 국정이 그릇된 지 오래이고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건대,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 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은 지가 오랩니다.
말단 관리들은 아래서 시시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 모으는 데 혈안입니다.
뿐만 아니라 궁궐 안의 신하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궁궐 밖의 신하들은 향리에서 백성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이 생각해 보면서 탄식만 나올 뿐,
낮이면 하늘만 쳐다보기 여러 차례였고, 밤이면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잠을 못 이룬 지가 오랩니다
자전(慈殿)은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나이 어린 한 외로운 자식-고아-일 뿐입니다.
저 많은 천재와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주공과 소공을 겸하여
삼공의 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하찮은 신하인 저처럼 아무 능력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리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며,
아래로는 터럭만큼도 백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둑질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추호도 원치 않습니다.>
은일처사 남명을 기용해 사림을 널리 끌어안는 성덕의 정치를 연출하고 싶었던 왕은
정작 자신이 세상물정 모른 채 국정을 말아먹는 '고아'로 불리자 크게 분개하여,
조식을 불경군상죄로 다스리고 상소문을 올린 승정원까지 죄를 주고자 하였지만
사관과 경연관들의 결연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소문(疏文)의 대의를 보지 못하고 '고아'와 '과부'라는 자구에만 얽매인 명종의 용렬함은
'말의 성찬'을 살고 있는 나와 우리의 말놀이를 돌아보게 한다.
'볼 거 없더라'는 진중권의 한 마디에 온 나라가 벌떼처럼 왱왱거리는 모습이나
화덕헌의 '양아치'를 광주 정신의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협애함이 무엇이 다르랴.
공옥진의 병신춤에 딴죽을 걸었던 일부 장애인 단체의 우매함과 또 무엇이 다르랴.
진중권의 미학 정신과 비평적 지향을,
덕헌이 온축하고 체현해 온 사상과 사진의 깊이를,
공옥진의 신산스러운 삶의 무늬를 온전히 살피지 않은 채,
한두 마디의 말을 기화로 그네들을 임의대로 재단하려는 이들이야말로
윤똑똑이다. 헛똑똑이다.
다시 명종대로 돌아가 조식의 소문에 대한 당시 사관의 평을 보자.
<조식은 일사(逸士)로서 야에 있는 이다.
비록 작록 보기를 부운같이 하나 오히려 임금을 잊지 않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언사에 나타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른 말, 옳은 말을 솔직하게 하였으니,
과연 그 이름을 헛되이 얻은 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어진 이로다.
이러한 조모(曺某)의 소에 대해 우답(優答)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글귀를 책잡아 승정원에게 청죄를 하라 명하니,
언로를 막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고, 왕의 인격을 깎아 내림이 이보다 큼이 없다.
왕명이 이같이 나가면 이는 곧 일국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되어
아무도 감히 말할 수 없게 하는 일이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텍스트를 컨텍스트와 분리하여 조식을 벌하고자 했던 왕과 달리,
사관은 조식의 글과 사람됨을 함께 보면서 언표 속에 깃든 남명의 진의를 놓치지 않고 있다.
꼬투리는 꼬투리일 뿐 알맹이가 아니다.
말의 꼬투리를 잡아 험구하는 이들의 진정성을 모르지 않는다.
허나 내남을 무론하고 명종과 같은 쩨쩨함을 이제 벗어 던지고
부디 맑은 눈으로 언어의 알맹이를 또 삶의 고갱이를 보아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