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비와 비 사이에 비는 한없다
나와 나 사이에 나는 또 한없이 존재한다
늘 나는 겹쳐본 적이 없다
누군가 내 사이에 끼어 들어와 늘 우산을 쓰지 못하게 했다
비와 비 사이에 나는 또 노출된다
우산 쓰는 일이 이젠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또는 우산은 내게 속해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사람들은 내게 우산이 없다는 것과 우산을 쓰지 않는 일에 대해 늘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비를 맞는 일이 얼마나 인간적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축축하게 젖은 나는 늘 그렇듯이 알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는 눈물찌꺼기와 중력의 법칙에 순순히 따르는 추욱 쳐진 빈젖의 나는 칠순을 막 넘겼다
사실 이대로 나는 다섯 살 여자아이가 될 수도 있고 이제 막 초경을 경험하는 소녀도 될 수 있고
가슴 떨림에 잠 못 이루는 스무살 처녀도 될 수 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나는 알 수 없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고 축축하게 젖어버린 앙상한 몸이 드러날 때에야 나는 있다
요람에서 곧 새로 맞이할 내 영원의 집인 무덤까지 그것이 곧 요람이 될 것이며
그것이 이생에서 한 번도 없었던 우산을 갖는 일이며 알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안다
빗 속을 뚫고 앙앙거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바늘 같은 빗줄기에 노출된 나다.
이제 그 빗 속을 거치면 나는 말갛게 씻겨질 것이며 말랑말랑해서 차마 만져볼 수도 없이 빛이 나는
자궁 속으로의 여행을 떠날 것이다. 더 이상 우산은 쓰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