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운(柳東雲)
묘역번호: 2-45
생 애: 1961.01.01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대학생(한신대 1학년)
유 족: 류연창(부)
1971년 광주에 와서 목회를 시작한 아버지 류연창 목사는 반유신운동에 앞장서다가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류동운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당한 국가권력이 아버지를 탄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분명한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류연창 목사가 1976년 이른바 광주교육지표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아들 동운도 함께 연행되었다. 아들의 책상에서 불온한 유인물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까지 연행하여 고생시키는 것에 항의하여 3일 동안 옥중 단식투쟁을 했고 결국 3일만에 아들은 풀려났다.
광주 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신대에 진학한 동운은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가 5월 20일 계엄군에게 붙잡혀 연행되었고 22일 석방되었다. 집을 나가서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식구들이 걱정하며 찾아 헤매던 차에 들어온 동운은 머리에 상처가 나 있었다. 집에서 하루를 쉰 동운은 다시 시내로 나갔다. 전남도청에 들어가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당시 전남도청에서 활동하던 수습대책위원회는 이른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사태해결의 방법에 극명한 노선 차이가 생겼다. 동운은 그 중에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사태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투항하는 것이므로 결코 안 된다는 입장에 섰다. 끝까지 항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도청에서 활동하던 수습대책위는 온건파 위원들이 나가게 됨으로써 조직이 재편되고 계엄군과 마지막까지 항쟁하기 위한 준비를 청년들 중심으로 진행하며 자체적으로 광주의 치안질서 유지와 사상자들의 처리 등을 분담하여 자치체제를 꾸려가기 시작했다.
5월 23일 아버지 류연창 목사는 도청에 들어가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광주의 마지막 상황을 예감한 아버지는 아들이 더 이상 나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동운이는 결심이 굳어 있었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나가지 마라, 나가면 죽는다”며 만류해 보았다. 그러자 동운은 “아버지, 아버지가 하신 설교와 생각이 바뀐 것입니까? 신념이 바뀌면 안 됩니다. 아버지! 이럴 때일수록 신념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라고 자신의 뜻을 분명히 했다. 자신이 주일 설교에서 “정의가 죽어갈 때 누군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진리와 역사와 정의를 위한 희생을 주문했던 내용이 아들 동운에게 용기와 힘을 준 것이었다...
5월 26일 이제 계엄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최후통첩이 전해졌고 모든 전화마저 두절되었다. 이날도 아버지에게 동운은 그 소리를 반복하고 나섰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분명한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집을 나가면서 쓴 글에는 ‘나는 이런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내가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날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Pyeongtaek] 03: 대추초등학교 2006년 가을운동회 http://www.raysoda.com/Com/BoxPhoto/FView.aspx?f=S&u=8913&s=VD&l=46749&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