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이 내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를 소개하는 명함에 portrait'ist 라는 글귀가 그려진다.
인물 사진을 왜 찍느냐는 매니지먼트 실장의 물음에
"희노애락을 모두 찍을 수 있으니까요." 라고 멋드러진 대답을 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내용도 없고, 철학도 없고, 이상도 없다.
무미건조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적당한 빛에 세워두고 근접에서 촬영을 한다.
프레임에 꽉 차게 찍는 것이 나는 마음에 든다. 롱샷이나 풀샷은 좋아하지 않는다.
섬세한 묘사력으로 인물을 표현해 내고 만다. 그리고 찍은 사진을 모니터로 보면서
색감을 잡는다. 나는 Blue 를 좋아한다. Green 은 촌스럽지만 풋풋한 느낌이 나고
Red 는 컨트라스트를 엉망으로 만들고 Yellow 는 아련하지만 동시에 뚱뚱한 남자가
스키니진을 입는 것처럼 내게는 영 거북한 일이다. 그래서 Blue 가 좋은 모양이다.
다른 색들이 다 싫어서 Blue 가 좋은 모양이다. 말로는 세련되고 감정을 일으킨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현실은 너무 지루하다. Blue 로 색감을 흔들고
레이어로 피부를 환원시킨다. 현실과 비현실의 공존이라고 말하면 유치하지만, 고상하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다.
돈 받고 찍는 사진은 다르다. 콘티 잡는 사람이 컨셉을 다 잡아준다.
구성은 이렇게 하라, 배경처리는 어떻게 하라. 그럼 그대로 찍으면 된다.
반사판 잡는 사람이 빛도 만들어 주고 나보다 포토샵을 더 잘하는 후배 녀석한테 raw만 주면 된다.
내가 할 일은 셔터를 살짝 눌러서 초점을 잡고 브라케팅으로 한 씬을 3장씩 찍으면 된다.
그리고 약 15도 정도 각도를 틀어서 다시 찍고, 무릎을 굽혀서 찍고,
"카메라를 보지 말고 날 보세요." 라고 외치면 된다. 그래서 홈페이지에는 그런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왜냐? 나는 거저 먹었기 때문에. 사진찍은 게 아니라 놀았기 때문에.
세상에나, 나는 핀트도 안 잡는다. 핀트는 카메라가 잡는다. 나는 뷰파인더로 '구경'한 것 뿐이다.
옆 스튜디오 지름쟁이가 말한다.
"준욱씨 라이카는 안 써요? M7 이랑 35MM 크론이랑 50MM 룩스 정도는 갖고 있어야지."
그 말에 호기를 받아 나는 SLRCLUB 장터를 검색하고 LG CARD 사이트에서 카드값을 계산해본다.
10개월 할부로 사면 갚을 수는 있을 듯 하다. 카드결제창을 띄워 놓고 고민한다.
지름쟁이가 한술 더 뜬다. "현상은 안 배웠소? 후딱 일포드로 찍고 현상해야지."
끊은지 4개월 째 접어드는 담배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컴퓨터의 전원이 연결된
멀티탭을 발가락으로 끄고는 카메라를 들고 후다닥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선다.
비가 온다는 하늘은 하염없이 맑다.
내가 태어나서 20년을 살았던 동네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간덩어리가 커져서 셔터를 누르지도 않는다. "저거 찍어봐야 사진 안 나와." 라고 생각한다.
사진쟁이가 사진 찍을 것이 없어서 사진 안 찍는 다는 것은 스스로 존재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사진의 대상이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아침마다 밥 먹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에서 모정을 담을 수 있다. 그것을 얼마나 정확히 담느냐는
전적으로 사진가의 역량 문제다.
우연히 한 아이가 지나간다. 국민학교 6학년 때 365일간 그녀만을 생각하며 어떻게 편지를
쓸 것인가를 고민하던 나의 첫사랑과 꼭 닮았다. 지난 10년간 잊고 살았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늘이 노래진다. 나에게도 여전히 순수함이란 것은 유효한 것이었던가?
사랑한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비가 무던히도 내리던 다음 해 여름날, 나는 그녀를 더이상
보지 못했다.
맑은 하늘이 뿌옇게 흐려진다. 땅바닥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쏟아진다. 아스팔트 냄새가
내 코 끝을 자극한다. 매캐한 아스팔트의 냄새가 그녀를 보낸 여름날을 회상하게 한다.
철창을 하나두고 그녀와 나는 길을 걷는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는 변함 없이
내 옆에서 걷고 있다. 연사를 찍기는 싫었다. 나는 단 한 장의 사진만을 남기고 싶었다.
떠나 버린 그 사람, 멀리 떠나버려서 흔적을 찾기 힘든 내 순수성을 향한 꼴 사나운 항변이랄까?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내 기억속에서 흐려진 그녀처럼 사진 속 그녀도 초점이 맞지 않는다.
한참을 울었다. 내 떠나간 시간들이여. 보낸 과거의 흔적들이여.
나는 이렇게 돌아가고 싶어도 여전히 시간은 흐른다.
한 장의 사진이 내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단지 사진은 현실을 묵묵히 바라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