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열(金富烈)
묘역번호: 2-29
생 애: 1963.05.03 ~ 1980.05.24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지원동 부엉산 추정
기 타: 학생(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3학년)
유 족: 김차남(모)
돌아오지 않는 부열이의 손에는 이미 총이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기다릴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광주의 시민들을 죽였는지 봐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린 가슴에 채워진 분노는 총을 들고 적들과 싸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를 한 계엄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양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제7특전여단의 33, 35대대와 제11특전여단의 61, 62대대는 지원동 주남 마을에 기지를 설치하고 광주-화순 간 도로를 차단한 후 봉쇄 작전을 펼쳤다. 이에 화순에서 광주로 들어오던 많은 시민과 광주로부터 화순으로 나가려던 많은 양민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했고, 지원동 주남마을 주민들에게도 총격이 가해졌다. 부열이는 주남마을 야산에 매복한 군인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되려 그들의 총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집을 나간 이후의 부열의 행적을 알 수 없었고, 23일과 24일 사이에 계엄군의 총에 사살당했다는 것만이 이후 봉쇄 작전의 임무를 인계받은 20사단 군인에 의해 밝혀졌다...
열흘, 스무날이 지나고 6월 12일 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부열이가 주남마을 뒷산에 매장되어 있으니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땅을 팔 인부들을 사서 부열이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함께 간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부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처럼 처참하게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부열이의 목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가슴팍도,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신체의 조각을 잃어버리고 검붉게 썩어가고 있는 그 시신이, 자다가 눈을 떠서도 볼 수 있었던 형제의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사실에 치떨리는 분노가 솟을 뿐이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