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金東秀)
묘역번호: 2-27
생 애: 1958.07.02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장성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구내
기 타: 학생(조선대학교 3학년)
유 족: 김영석(부)
‘폭도’ 김동수는 1980년 당시 조선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불심에 심취해 있던 그는 대학생 불교연합 전남지부장으로 활동을 했다. 5월초에는 고조할아버지의 묘지 이장 관계로 고향인 장성에 머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 서너 명의 친구들이 동수를 찾아왔다. 초파일이 곧 다가오고 있었고 지부장인 동수가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점심이라도 들고 가라는 아버지의 청을 만류하고 산 일을 하던 동수와 일행은 바로 광주로 올라갔다. 동수는 5월 17일에 도청 앞 점등식에서 사회를 맡아 행사를 진행하고 다음날 18일 오전에 연합회 일로 목포에 내려갔다. 광주에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고 시내 곳곳에서 청년, 학생들이 그들의 몽둥이와 칼에 난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수는 전혀 알지 못했다. 5월 21일 드디어 계엄군은 광주의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너무도 기가 차고 분한 시민들은 광주 전남 일원의 무기고를 향해 차를 몰아갔다. 목포에 내려온 시민군이 들려주는 소식을 동수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광주에 올라가야 했다. 목포의 동료들에게도 여러 날 신세를 지고 있어 그것도 미안했다. 부처님의 진정한 자비는 정의를 위해 대중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 젊은 청년은 시민군의 차에 올라탔다...
그날은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다. 장성군청에 다니는 집안 아저씨뻘 되는 김용대 씨가 찾아왔다. 논에 있는 동수의 아버지를 다짜고짜 끌어내 뒤따라오게 하고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 사람아, 내가 이 말을 어떻게 자네한테 해야 하는가.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 글고 버티소. 그 길밖에는 없네. 동수가 죽었다네. 도청에서 총에 맞은 것을 망월동에다 묻어 놨다네. 시방, 시청에서 차가 와 있응게 그놈을 타고 광주로 올라가세.”
1980년대 후반에 유족회에 합류하셨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 앞에 붙은 폭도라는 오명을 씻어주고자 애를 쓰셨다. 명동성당에서 몇 개월간이나 고생하며 농성을 하고 시위에 쫓아다녔던 지난날 덕분에 이제는 동수는 더 이상 폭도가 아니다. 민주화를 꿈꾸다 장렬히 산화해간 열사이다. 처음부터 폭도인 적도 없었던, 처음부터 열사였던 아들의 이름을 찾아 주었다. 하지만 5․18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은 짐승보다도 못하게 여기던 죄인들은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아가고, 법이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선한 사람들은 날마다 고통 속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는 그들은 그대로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사들인 총칼을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되돌렸던 가해자들은 일말의 죄의식조차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떳떳하다. 그리고 아픈 가슴을 안고 세월을 버텨온 이들은 여전히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해 아프다. 조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얼굴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퇴색되어 가는 것이 더욱 아프다. 온갖 것을 다 가져다 주어도 내놓을 수 없었던 자식을 보내고 술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아버지는 그래서 더욱 분하고 억울하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