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기(曺日奇)
묘역번호: 2-26
생 애: 1948.05.20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화순
사망 원인: 타박사
사망 장소: 광주공원
기 타: 식당 주방장
유 족: 김복의(모)
서울에 있는 줄만 알았던 조일기는 5월 17일 중흥동에 사는 셋째 형 일우 씨의 집에 들렀다. 그리고 항쟁기간 중에 다시 한 번 들렀다. 그때 조일기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다. 형은 깜짝 놀라며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렸다. 총을 뺏어 탄창을 빼고, 총 따로, 실탄 따로 감추어 두었다. 그 정도의 만류면 동생이 들어줄 것이라고 여긴 형은 집에 들른 동생에게 주려고 딸기를 사러 나갔다. 그 사이 조일기는 총을 찾아 빈총만 들고 다시 나가버렸다...
그해 5월 10일간의 항쟁기간 내내 광주 시민들은 모두 조일기와 같은 마음이었다. 골목을 누비며 거리를 누비며 한 목소리로 계엄 철폐를 외치고, 사그라지는 민주주의의 불꽃을 다시 피우고 싶었다. 조일기는 그 최전방에 서서 총을 들었다. 정의가 아닌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막아야 했기 때문에, 다시 군부의 손아귀에 내 부모 형제를 맡길 수 없었기에 총을 들었다.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벗어나지 않은 조일기에게는 광주공원으로 들어올 공수의 경로를 차단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광주공원 폭도 소탕 작전의 임무를 부여받은 제7특전 여단은 실내체육관, 시민회관, 도서관 및 양로회관, 박물관 및 미술관 등 네 개 건물을 선정, 광주공원의 시민군을 완전히 와해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통합병원을 거쳐 광주공원까지의 특공조 진입로는 시민군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고,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총성으로 지역주민들은 밤새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27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제7특전사의 작전은 동이 터 오는 5시 42분 공원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끝이 났다. 밤새 이길 수 없는 적들과 맞서 총을 쏘았을 조일기는 아침에 광주공원 정문 왼쪽에서 경찰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총상이 아니었다. 전신을 구타당하고 머리가 깨져 죽어있었다. 목표물을 향하던 적들의 총을 피해 살아남았지만 교전이 끝난 후에 공수에 붙들려 매질을 당하다 사망한 것이다. ‘광주시민은 폭도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도망가면 끝까지 추적하여 반드시 때려잡는다. 죽여도 좋다.’는 항쟁 초기의 진압방식은 마지막까지 적용되어 조일기는 목숨까지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