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일(張夏日)
묘역번호: 2-09
생 애: 1942.01.15 ~ 1980.05.23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대 병원
기 타: 노동자
유 족: 장하연(형)
울리는 총소리에 뒤로 돌아 몇 걸음이나 떼어 놓았을까. 뒤따라 와야 할 형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장하연 씨는 순간 심정이 멎는 듯 했다. 돌아보니 형의 배에서 피가 품어져 나오고 있었다. 형이 바닥에 피를 흥건히 쏟아내고 필사의 힘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손에서도 피가 났다. 총알은 하일 씨의 손을 스치고 그의 등을 뚫은 것이다. 망연하지만, 그렇게 놀라 서 있을 새가 없었다. 하연 씨는 옆에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형을 부축해 질질 끌면서 피가 낭자한 길을 걸어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그 사이에도 금남로의 총성은 멎지 않았다. 죽음의 거리였다...
하일 씨는 수술을 끝내고도 이틀을 견뎠다. 비록 온전하지는 못했지만 흐린 정신이나마 있었고, 혼자 남겨질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어쩔 줄 몰랐다. 하일 씨와 하연 씨는 단 둘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생활했던 그들은 담양에 있는 고모네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재단 일을 배웠다. 재단사로서 일하는 사이에도 그는 강원도 태백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종교활동을 했다. 그는 결혼도 포기했다. 신부가 되고 싶었다. 동생은 광주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형은 서울에서 일과 봉사 생활에 충실했기에 서로 자주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 안타까웠던 하일 씨는 동생과 단 얼마간이라도 함께 지내고 싶었다...
하일 씨는 1980년 초에 광주에 내려왔다. 그리고 5월이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푸르른 오월의 하늘과는 너무도 다른 광주의 날들에 하일 씨는 매일 시내로 나갔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가만히 앉아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인생 설정 또한 없었을 것이다.
공수들의 모든 것을 보아버린 하연 씨는 매일 밖으로 나가는 형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말려질 사람이 아니었다. 걱정이 된 그는 상황이 급격해진 21일에는 형과 함께 나섰던 것이다. 도망갈 수도 빌 수도 없었다. 총알이 휙휙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음식을 나눠먹은 내 형제들이었다. 적진이 아닌 내 나라 땅 광주 시내의 한복판에서 내 나라 군인이 정조준한 총을 겨눌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총격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하일 씨도 하연 씨도 폭도였다. 그해 5월의 비극은 폭도라는 오명을 그들 형제에게 지워줬고, 정보과에서는 언제나 하연 씨를 미행하고 감시했다. 다른 형제가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부모의 어느 한 쪽이라도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면 그처럼 황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 하연 씨는 완전히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의 외로움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게 했다. 무엇으로도 형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그들의 죄가는 분명히 치러져야 했다. 하연 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이 없어도 세상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도 돌아갔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